변호사인 한 지인이 자신의 배석 판사 시절 경험담을 SNS에 올렸다. 형사 재판 피고인이 "불미스러운 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라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자 재판장이 호통을 쳤다. "피고인, 아직도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는군요. 불미스러운 일로 물의를 일으켰다고요? 피고인은 중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아름답지 못한 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이 언제부터 사과의 의미로 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치인들이 수시로 입에 올리다 보니 오염(?)되었을 뿐 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잘못에 대한 반성과 재발 방지 각오가 없는 사과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운 일에 대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사과했다고 감읍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야만적 행태를 접한 대다수 국민은 분노와 격앙 속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북한의 만행도 문제지만 우리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의 대응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통일전선부가 '보냈다는' 통지문에서 김 위원장이 두 번이나 사과의 뜻을 표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해 준다'. "우리 측 수역에서 뜻밖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게 진정한 사과라 생각한다면 국민적 호통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고요? 당신들은 인륜에 반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김 위원장 명의도 아닌 통전부 통지문을 김 위원장의 뜻이라 반색하는 처지도 애처롭지만 그 내용은 적반하장에 가깝다. 우리 국방부가 애써 월북자로 단정한 피살자를 북한은 '불법 침입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해상에서 발견한 우리 공무원에게 공포탄을 쏘고 '도주할 듯한 자세를 취해' '10여 발의 총탄으로' 사살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일방적 억측으로 만행, 응분의 대가 같은 불경스럽고 대결적 색채가 강한 어휘를 골라 쓰는지" 유감이라는 게 저들의 주장이다. 도리어 우리를 야단치는 통지문에 '미안'하다는 말이 들어간 게 무에 그리 대단하다는 말인가.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칭송한 듯한 말은 기실 북한이 김씨 왕조 군주국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전시에도 비무장 민간인 사살은 '전쟁 범죄'로 처벌한다. 전쟁 중이 아닌 상황에서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을 조준 사격한 것은 시효가 없는 중범죄이다. 범죄 운운도 실은 민망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일단 구하고 보는 게 동서고금의 사람 된 도리이다. 더구나 북한과 우리나라의 일부 인사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우리 민족끼리' 아닌가. 북측 통지문에서도 "대한민국 아무개라고" 하는 표현이 나온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알고도 사살했다는 자백이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위한 남북 공동조사를 우리가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는 근거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이야 그렇다 치자. 분노는 치솟지만 인간의 존엄성 대신 지도자를 '최고 존엄'이라 칭하는 북한의 만행이 사실 놀랍지는 않다. 참으로 놀랍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 정부와 문 대통령의 태도이다. 북한 앞에만 서면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조차 작아지는 것인가. 영흥도 낚싯배 침몰 사고에 대해 문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책임"이라고 말했다. 헝가리 유람선 침몰 때에도 문 대통령은 민방위복을 입고 총력 대응을 지시한 바 있다. 이번 사건은 당시 사고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국가의 실패다. 과실로 인한 사고와 달리 충분한 시간이 있는데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이번 사건은 고의적 부작위에 가깝다. 최초 보고 때부터 문 대통령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라"는 지시를 했다면 국방부, 통일부, 국정원 등이 넋 놓고 지켜보기만 했겠는가. 우리 국민의 생명이 희생당했다는 결과도 중대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우리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 엄중하다. 북한에 대한 추궁 못지않게 우리 정부의 책임에 대한 진상 규명 역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진영의 문제가 아닌 주권자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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