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폭력을 둘러싼 재판에서는 '성인지 감수성', 즉 성범죄 사건을 피해자의 상황과 맥락에서 판단하려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법정 밖에서는 여전히 성범죄 피해자를 특정한 선입견에 가둔 채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지 감수성을 둘러싼 법정 안팎의 온도차를 없애기 위해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조롱받는 성인지 감수성
대구고등법원은 지난 7월 대구의 한 직장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이에 관한 기사에는 '성폭행을 당하고 바로 신고를 안 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성추행을 하는데 왜 가만히 있었느냐' 등의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또 '가해자가 무죄든 유죄든 술 한 잔 하고 그럴 수 있다', '자기 몸은 자기가 먼저 지켜야 한다', '회식 자리에서 만취할 때까지 마시면 어떡하느냐'와 같이 성범죄 원인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댓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해당 사건은 검찰과 피고인의 쌍방 상소로 대법원까지 가게 됐고, 지난 24일 법원은 원심이 선고한 징역 2년의 실형을 확정했다.
일상에서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 많은 경우 피해자가 범행 전후 '피해자다운' 행동을 했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례를 볼 수 있다. '피해자다움'은 여느 범죄 피해자와는 달리 성범죄 피해자라면 늘 침울하고, 우울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란 편견이다.
최근에는 '킹인지 갓수성' 등 성인지 감수성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최고'를 뜻하는 '킹(king)', '갓(god)'을 붙인 이 말은,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한 판결이 마치 '재판부가 피해자의 주장만 받아들여 결론을 내린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등장한 것이다.
◆판례로 적립된 성인지 감수성, 현실에서는 낯설다
성인지 감수성이 판결로 정립된 것은 지난 2018년 4월 대법원이 성희롱 관련 사건을 선고하면서다. 당시 대법원은 성희롱을 한 대학교수가 학교를 상대로 낸 '해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단한 2심이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심리를 다시 하라고 파기 환송했다.
재판부는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판례는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이 확정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도 적용됐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 전 지사는 지난 2018년 8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과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안 전 지사가 진술을 수차례 번복한 점, 범행 이후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미안하다"고 한 점 등을 유죄의 근거로 삼았다.
해당 사건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온 지 1년이 지났지만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일으키는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안희정 전 지사와 관련된 기사에서는 '법적으로는 유죄일지 몰라도 심적으로는 무죄' 등의 조롱 섞인 댓글을 수 없이 찾아볼 수 있었다.
◆피해자 심리에 대한 선입견은 지양해야
성범죄에 지나치게 관대한 이 같은 인식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 성범죄의 경우 무죄율이 다소 높다는 것과도 맥이 닿는다. 국민참여재판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유무죄의 평결을 내리는 재판 방식이다.
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08~2017년 국민참여재판에서의 성범죄 무죄율은 평균 18%에 달했지만 일반 재판으로 진행한 성범죄 무죄율은 2.4%에 불과했다.
이는 미성년 제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 중인 전 국가대표 유도선수 왕기춘(32) 씨가 즉시항고, 재항고를 거치면서까지 국민참여재판을 주장한 이유와도 통한다. 왕 씨는 첫 재판 당시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며 피해자와 연애 감정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처지에서 사건을 이해하려는 일상에서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신미영 대구여성회 사무처장은 "상사에게 폭언을 듣거나 공을 가로채이는 등 부당함을 당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대부분은 바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것처럼 직장 내, 혹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도 비슷하게 생각해야 한다"며 "신고할 경우 입을 직장 내 불이익 때문에 피해를 입더라도 바로 항의를 못 하다가 나중에야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의 행동을 일정한 선입견에 가두는 것도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신 사무처장은 "간혹 피해자가 여행을 간 사진을 SNS에 올리거나, 일상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피해자가 맞나?'며 피해 사실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며 "성폭력 피해자는 당연히 심리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모든 피해자가 온종일 피해 당시만 생각하고, 침울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률적으로 피해자의 심리나 행동을 규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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