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올 추석 명절에는 '고향에 가지 않는 것이 효도'라는 웃픈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안타까운 것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취업난에 청년들이 대거 구직활동을 보류했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으니 직원을 뽑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다양한 청년 일자리 지원을 내놓고는 있지만, 대부분 단기로 진행되는 것뿐이니 청년들은 몇 개월 '구직' 걱정을 접어두는 정도라 앞날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 때는 정전협정으로 6·25전쟁이 끝난 1953년이었다. 서울 명동 미도파백화점 앞에 한 청년이 서 있다. 깊게 눌러 쓴 벙거지, 모자에 가려 눈이 보이진 않지만 드러난 얼굴선이 근사하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댄 모습은 지금으로 치면 꽤나 스타일리시한 패션 화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청년이 허리춤에 찬 종이에는 '求職'(구직)이란 한자가 반듯하게 쓰여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한 이 사진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이자 한국 현대 사진의 대부라 불리는 임응식(1912~2001) 작가의 대표작이다.
'구직', 한 장의 사진이 참 많은 이야기들을 소곤거리며 들려준다. 전쟁 직후 직면한 경제적 피폐며 신분의 변화, 청년 실업, 그리고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모습 속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상흔이 지워진 듯 활기도 느껴진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전쟁 직후의 삶이 생생하게 포착된 이 작품은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사진 경향은 회화적 감성이 담긴 '살롱 사진'이었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 앞에서 관조적 풍경 사진이 웬 말인가. 6·25전쟁을 겪으며 한국 사진계는 이전까지 탐닉해 온 '살롱 사진'에서 벗어나 사회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돌아섰으니,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주자가 바로 사진가 임응식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줄곧 부산에서 살았기에 전쟁의 참혹함과는 먼 삶이었다. 하지만 종군사진가로 발탁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이후, 임응식의 작품 세계에는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폐허의 그늘,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참혹한 현장을 누비며 사진이 지닌 사실적 기록성에 눈을 뜬 것이다. 그렇게 '구직'이라는 작품이 탄생했고, 그때부터 임응식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현실과 인간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리얼리즘 사진을 정착시켜갔다.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 서울대 미대 사진 강의, 중앙대 사진과 교수까지 그의 이력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함께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가 있는 것 중 하나는 최초로 한국인 주도의 아마추어 사진가 단체를 만들었고, 이후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잔잔하고 정겹지만 때론 마음을 흔들어놓는 흑백사진들,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생생한 모습을 기록한 그의 풍경들은 오는 18일까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만날 수 있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