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안중식(1861-1919), ‘갈대와 기러기’

미술사 연구자

비단에 수묵담채, 24.5×51㎝, 개인 소장
비단에 수묵담채, 24.5×51㎝, 개인 소장

보는 순간 이미지의 힘이 단박에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있다. 철학적인 산수화나 위인의 초상화, 경건한 사군자보다 새나 동물을 그린 영모화 중에 그런 그림이 많은 것은 뭇 생명에 감정이입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 같다. 달이 환한 가운데 겨울 철새인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이 그림도 그렇다. 그림이나 시각적 대상은 시간이 필요한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보는 순간 마치 스캔하듯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므로 공감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첫눈에 반하는 일도 일어난다.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노안도(蘆雁圖)는 계절이 바뀌는 시간의 무상함과 살 곳을 찾아 떠나는 기러기 떼의 쓸쓸함이 진한 서정으로 듬뿍 담긴 소재인데다 노안의 발음이 노안(老安)과 연관되어 노년의 안락을 뜻하는 그림이기도하다. 날고 있는 기러기의 가지각색 모양새가 설득력이 넘친다. 윤곽선이 따로 없이 단숨에 형태와 질감과 색감을 구사한 몰골법으로 그렸고 다양한 선 맛의 가는 붓질로 날렵한 깃털도 분명하게 나타냈다.

바람을 가르며 제일 앞서 나는 대장 기러기가 갈대를 입에 물려는 순간이다.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나는 것을 함로이자방(銜蘆以自防), 함노안(銜蘆雁), 함로(銜蘆)라고 하는데 『회남자』(기원전 2세기)에 나온다. 북쪽의 기러기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양자강 남쪽으로 날아올 때는 잘 먹지 못해 몸이 가벼워 높이 날지만 봄이 되어 북쪽으로 돌아갈 때는 살이 쪄 높이 날지 못한다고 한다. 양자강 어부들이 이것을 보고 그물을 치거나 줄이 달린 화살인 주살을 쏘아 낮게 나는 기러기를 사냥했다. 그러자 기러기들이 갈대를 가로로 물고 날아 이를 피해 갔다고 한다. 그래서 '갈대를 물다'는 함로는 보신책을 강구한다, 신중히 처신한다는 뜻으로 통한다.

'갈대와 기러기'는 무리지어 이동하는 철새라는 호소력 높은 이미지에 노후의 안녕과 위기에 대처하는 현명함까지 담았다. 인기 많은 소재여서 심전 안중식은 노안도를 여러 점 남겼는데 그가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은 오원 장승업의 노안도 수법과 필의를 본받았다. 이 부채 노안도에서 안중식의 대가다운 노련함은 달과 화제의 위치를 바꾼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원래 저 위에 있어야할 달을 부채꼴에 맞추어 오히려 갈대의 배경으로 확 낮추고 화제시를 기러기와 달 사이에 배치한 것이다. 갈대 너머 푸른 달무리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더욱 둥글어 오히려 달이 주인공인 듯하다. 1913년 여름 호가 심재(心齋)인 분의 부채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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