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을 보냅니다.
어머님은 이제 영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얼마 전 어머님 돌아가시고 집 뒤꼍을 정리하다가 땅속의 수선화 뿌리를 발견했습니다. 우물 있던 자리 옆 화단에 싱싱한 잎줄기 끝 노오란 꽃이 활짝 피곤 했습니다. 어머님이 조석으로 우물물을 길으며 쳐다보고 설거지하며 바라보던 꽃이었습니다. 밝은 노란빛 꽃이라 뒤꼍을 화사하게 하고 마음까지 밝게 만드는 꽃이라 좋아하시던 꽃이었습니다.
어떤 꽃보다도 먼저 봄을 알리는 수선화처럼 부지런하시던 어머님의 살아온 일생을 되돌아보니 회한이 앞섭니다.
봄이 되면 문 토골 비탈진 밭에 약초 씨앗을 뿌리는 것을 시작으로, 여름엔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흰 수건 질끈 매고 가랑골 콩밭 매시던 모습, 가을 추수철 탈곡기 밟아가며 나락 타작 하시던 우리 어머니, 겨울이면 밤늦도록 도라지 껍질을 까 영천 한약방에 내다 파시고 작은방에서 "달그락 척, 달그락 척" 소리를 내며 베틀에 앉아 삼베 짜던 당신의 모습이 선합니다.
꼭두새벽에 밭에 나가 별 보고 집에 들어와 저녁상을 뚝딱 차려 내시는 게 그때는 당연한 일상인 줄 알았습니다.
19살, 꽃다운 나이에 화정골 빈촌에 맏며느리로 시집와 홀시아버지 모시고 밑으로 두 시동생에 시누이 시집·장가까지 보내며 7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습니다.
시집오니 산비탈 자갈밭 몇 뙈기가 전부였지만 묵묵히 일만 하시는 아버지와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어 들판에 어엿한 문전옥답을 소유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었는지 우리 자식들이 뼛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밭이랑을 일구고 맸으면 두 무릎뼈가 다 닳아 노후에 인공관절까지 시술하였겠습니까.
인공관절 시술에도 불구하고 노후에 두 다리가 불편해 너른 고향 집을 두고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는 불효자식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요양병원 생활이 하루하루가 감옥 같았겠지만, 자식들 힘들게 하지 않으려 체념하고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3년 전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고향을 다녀가실 때 다시는 고향에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당신을 아셨을 겁니다. 한세월 같이 일하던 동네 할머니들 한 분 한 분 손잡아주고 한평생 정들었던 고향 동구 밖 굽이길 돌아설 때 차 안 뒷좌석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 삭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합니다.
팔공산 험한 산길을 걸어 갓바위 부처님에게 자식들 건강하고 집안 복되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시던 어머님 덕택에 우리 7남매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가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평소에 늘 말씀하셨습니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라고, 그리고 어머님은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두 분 삼촌과 고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대신해 알뜰히 보살펴준 우리 어머님을 친어머니처럼 존경하고 따르시어 인근 동네에서 형제간에 우애 있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우리 7남매 많은 형제자매 간이지만 평소 어머님이 말씀하시고 실천한 것을 본보기로 하여 서로 돕고 위하는 사이 좋은 화목한 형제자매로 살겠습니다.
부디 남은 자식들 걱정일랑은 모두 내려놓으시고 훨훨 나비 되어 어머님 생전에 좋아하시던 수선화꽃 어우러진 먼 꽃길 따라 미지의 세계 긴 여행의 여로를 향해 날아가도록 하십시오.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일은 잊으시고 4남 3녀의 자식들을 멋지게 키운 것과 16명의 손자 손녀들의 이쁜 모습만을 가져가십시오.
내색하지 않고 어머님을 위해주고 함께 평생을 고생하시며 사셨던 먼저 가신 아버지와의 즐거웠던 추억만 간직하고 가시옵소서.
어머님을 그리는 마음을 애잔하게 시로 쓰신 등단 시인인 셋째 형님의 '흰고무신'이라는 시 중에 일부분을 어머님 영전에 올립니다.
흰고무신 걸리적 거리어 밭둑에 벗어두고는
호박도 심어야 하고 오이에다 도라지도 심어야 하는데
울 엄마 일하고 싶어 어디 갔노?
또 다시 돌아보아도 뒤에는 엄마의 그림자도 없네
주르륵 구슬 눈물 밭고랑을 적신다
꽃이 진 나무에 노랑새 한 마리만 내려다보고 있다
당신의 가시는 길에 넷째가 올립니다.
어머니(최동분)를 사랑하는 아들(하중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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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역 사회의 가족들을 위한 추모관 [그립습니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귀중한 사연을 전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서를 작성하시거나 연락처로 담당 기자에게 연락주시면 됩니다.
▷추모관 연재물 페이지 : http://naver.me/5Hvc7n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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