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여포·장비·관우·조운·마초·허저·전위·감녕 등 무인들의 싸움판이기도 했지만, 선비들의 설전(說戰) 무대이기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바둑판 다면기(多面棋) 같은 '1 대 다수'의 싸움을 특히 주목했다.
여포가 유비·관우·장비 3형제와 동시에 맞붙은 걸 넘어서는 수준의 설전이 있다. 조조군이 쳐들어오자 제갈량이 손권의 오나라에 가서 장소·우번·보즐·정병·설종·육적·엄준·장온·낙통 등 중신들을 제압한 것이다. 설전에서 이긴 제갈량은 유비군과 손권군의 동맹이라는 목표를 이룬다.
스케일로 따지면 제갈량의 이 설전을 넘어서는 사례가 없는데, 다시 살펴보면 새로운 사례를 하나 꼽을 수 있다.
▶바로 예형이다.
기준을 대면에서 대면·비대면 모두로 넓히면 발견된다. 제갈량이 거의 대면으로 다수에게 독설을 날렸다면(설전으로 조조군의 왕랑을 죽인 연의의 내용도 유명하다), 예형은 주로 비대면으로 다수에게 독설을 날렸다. 물론 예형이 대면으로 제갈량보다 더 '센' 독설을 날린 경우도 있다. 아무튼 이게 소설인 연의는 물론 역사 기록인 정사와 후한서 예형열전 등에도 바탕을 둔 내용이다.
예형은 조조군에 가서 순욱·순유·정욱·곽가 등 간판 책사들을 비롯해 조인·하후돈·장료·허저·악진·이전·서황·우금·만총·여건 등 주요 장수들에게 '인물평' 형식으로 독설을 했다.
더구나 제갈량은 감히 시도조차 못한 군주 조롱까지 실행해 눈길을 끈다.
예형이 계속 자신을 비판하자 화가 난 조조는 망신을 줄 요량으로 예형을 북 치는 직책에 임명했는데 너무 잘 쳤고, '어양참과'라는 예형의 곡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정도다. 이어 조조가 누추한 복장을 트집 잡자 예형은 그 자리에서 옷을 모두 벗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때 조조의 말은 이랬다. "예형을 욕 보이고자 했는데 오히려 내가 욕을 보다니."
▶그런데 이때까지의 예형의 조롱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잽, 잽, 잽.' 예형은 조조의 약점을 짚었다. 후한을 찬탈해 손에 쥔 권력에 명분이 부족한 조조를 비판한 것이다. 앞서의 조롱들은 실은 밑밥이었고, 마지막에 일종의 시사 비평이 나온 셈이다. 그것도 당사자 바로 앞에서. '어퍼컷.'
당황한 조조는 예형을 직접 죽이면 자기 위신이 떨어질까 싶어 형주를 다스리는 유표에게 사신 명목으로 예형을 보냈다.
이어 예형은 유표에게도 토론에서 거듭 독설을 날렸고, 이를 조조만큼 못 견딘 유표가 예형을 수하인 강하 태수 황조에게 보냈는데, 역시 예형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황조는 홧김에 예형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원래 예형의 문장에 감복한 바 있는 황조는 곧장 후회했고, 예형을 후하게 장사 지내 묘를 만들어줬다. 강하라는 지명이 '우한'으로 바뀐 현지에 예형의 무덤이 유적으로 있다.


▶이쯤에서 예형과 제갈량을 비교해보자.
상대한 숫자만 봐도 예형이 앞선다. 아울러 오나라 중신들만 제압한 제갈량과 비교해 예형은 2인의 유력 군주(이미 당시 중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승상 조조, 중원의 요충지 형주를 다스리던 유표)까지 괴롭혔다.
사실 제갈량은 유비군 소속 공직자로서 오나라에 가서 동맹을 맺어야 하는 이유를 꽤나 도발적인 방법으로 관철해 목표를 이룬 것이다. 이와 달리 예형은 비평가로서 자유롭게 독설을 했다. 그가 맡은 북 치는 직책과 사신은 조조가 망신 주기 및 처리를 위해 임명한 것이고, 황조 곁에서 맡은 서기도 죽기 전 잠깐의 공직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10월 13일 '진중권씨는 삼국지의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앞서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되어버립니다.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 등의 발언을 한 조정래 작가를 비판한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두고, "진중권씨의 조롱이 도를 넘어서 이제는 광기에 이른 듯합니다"라며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고 했다.
조정래 작가의 말과 글이 어떠했고, 그에 대한 진중권 전 교수의 말과 글이 어떠했는지는, 양자 간 따로 다룰 일 또는 다툴 일로 보이며, 이에 대해 엄연히 제3자인 민주당이 어떠하다고 논평을 내놓은 게 논란이다.
해당 논평을 발표한 사람은 박진영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글 맨 앞) 및 민주당 공보국(글 맨 뒤)으로 민주당 홈페이지에 표기됐는데, 이 글이 개인의 글이 아니라 정당의 글(논평)로 공개됐다는 점에서, 글의 토시 하나부터 책임 소지까지, 한 정당이(그것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여당이) 비평가 1명을 비판하는 맥락이 만들어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논평에서 건질 게 있기는 하다.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하면 그리하라'는 마지막 문장이다. 역사를 다시 읽게 만든다.
"예형을 죽인 것은 지도층인 조조나 유표가 아니라, 시골 무부인 황조임. 조조나 유표는 국정에 바빠서 헛웃음으로 무시함"이라며 박진영 부대변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밝힌 해석 내지는 상상도 유효하지만, 황조에게 예형의 처리를 미필적 고의로 미룬 게 유표이고 이 유표에게 예형의 처리를 역시 미필적 고의로 떠넘긴 게 조조라는 맥락도 뻔히 보인다.
그랬듯 당시에도 죽이기 어려웠던 예형을 약 2천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 죽이기 어렵게 됐다. 여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이라서다. 특히나 공직자라서 잘못된 발언으로 조직에 해를 끼치면 안 되는 제갈량과 달리 예형 같은 비평가들이라면 더더욱. 저 표현의 자유가 좀 문제가 되면 서로 화내고 사과하거나 고소·고발을 해서 법적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곳 역시 대한민국이다.
결국 민주당 논평 마지막 문장은 진중권 전 교수 말고도 우리나라 수많은 예형들, 예를 들면 '시무 7조' 청와대 국민청원 글로 정부를 비판한 진인 조은산과 추석 특집 TV 콘서트에서 소신 발언을 한 나훈아 같은 예형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로 읽힌다. 설마 180석 여당이 일개 무직 비평가를 두고 죽길 바란다는 저주를 했을리가. 물론 예형에게 비판을 당한 조조 및 휘하 신하들의 저 많은 숫자가 괜히 180이라는 숫자와 연결되기도 한다.
PS. 전 정권에서 정권을 비판하던 수많은 예형들과 그 비판을 방어하던 수많은 예형들, 현 정권에서 정권을 비판하는 수많은 예형들과 그 비판을 방어하는 수많은 예형들, 그들의 표현의 자유 및 그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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