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은 전라도 고부군수로, 탐관오리였다. 그는 1894년 농민 수탈로 동학혁명의 불씨가 됐다. 그 죄로 고금도 섬으로 유배됐다. 하지만 1년 만인 1895년 풀려났다. 나라는 한술 더 떠 1897년 12월 31일 법부의 서열 3위(민사국장)로 임용했고 그는 1898년 1월 7일 고등재판소 예비판사도 겸했다. 1898년 7월, 그에게 시련과 영광(?)을 안긴 동학의 최고지도자 2대 교주 최시형의 사형을 판결한 고등재판소 판사 3명에 끼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어찌 법의 잣대로 사람을 잡은 사례가 조병갑뿐일까. '사법살인'이란 국제적 비판을 받아 사법사에 길이 빛날 오명을 남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사법부 전력도 다르지 않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대구의 여정남 등 소위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 선고를 확정했다. 정부는 이튿날 사형을 서둘러 집행,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다만 앞 재판부와 달리 대법원은 40년이 흐른 2015년 5월, 이들 사건 연루자의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물론 조병갑 같은 인물이 날뛴 나라와 정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권력의 편에 서서 판결을 내린, 그런 판사가 득실거린 정부와 지도자 또한 불행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배경 없고 약한 사람보다, 권력과 힘을 가진 쪽에서 법을 주무르는 무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진범 이춘재가 범행을 자백할 때까지 무려 2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숨죽여 살아야만 했던 한 피해자의 억울한 사연도 그런 결과였다.
법의 적용을 둘러싸고 정부가 바뀌고, 지도자가 달라진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의아하다. 법을 다루는 자격증을 딸 때까지 공부했던 사람들이 보고 배웠던 법의 의미가 자격증을 얻은 이후에는 아마도 달라지는 게 이 나라의 법 문화인 모양이다. 법을 구실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우두머리라고 부를 만한 법무부 전현직 장관의 자녀를 감싸는 사례만 봐도 그렇다. 과연 이들뿐일까.
행정부와 국회 등 부처 가릴 것 없이 범법의 공유로, 공범자가 되어 진영의 서로를 챙길 수밖에 없는 무리들은 또 어떤가. 그러나 물처럼 흘러 돌고 도는 법(法)을, 그들이라고 마냥 피해갈 수만 있으랴. 다만 시간이 더디게 좀 걸릴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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