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화폐에도 등장하는 제니 린드(1820~1887)는 멘델스존, 쇼팽, 슈만, 베를리오즈 등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19세기 소프라노 가수다. 지금도 영국, 미국, 캐나다뿐만 아니라 북유럽 국가의 대학, 병원, 교회, 건물과 도로에 그녀의 이름이 남아 있다.

제니는 200년 전 10월 6일 스톡홀름에서 교사였던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 출산한 혼외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출산 후 이혼당했고, 제니는 외롭게 자랐다. 아홉 살의 제니가 고양이에게 불러 주던 노래를 우연히 들은 왕립극장 소속 유명 발레리나의 하녀가 그녀를 발레리나에게 소개했고, 그 덕분에 제니는 왕립극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18세에 오페라의 주역을 맡아 찬사를 받았고, 곧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궁정 가수가 되며 북유럽에서 유명해졌다. 제니는 덴마크에서 동화작가 안데르센과도 우정을 쌓았는데, 소심했던 안데르센은 제니가 독일로 떠날 때에야 역에 따라가서 청혼 편지를 전했으나 바람을 맞았다. 베를린으로 간 제니는 오페라 디바로서 크게 성공하여 '스웨덴의 꾀꼬리(나이팅게일 새)'란 칭송을 들었고, 무료 공연과 공연 수입을 기부하여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1847년, 제니는 런던으로 진출하여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데뷔했다. 독일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스승 멘델스존도 영국으로 와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런던에 있던 2년간은 오페라 가수로서의 절정기였다. 멘델스존이 바로 그해 독일로 돌아가서 사망하자, 제니는 멘델스존 작곡의 '엘라이자의 아리아'를 불렀고 공연 수익금은 멘델스존 장학기금으로 기부했다.

제니는 런던에서의 두 시즌을 끝으로 절정기인 29세에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미국의 흥행업자 바넘이 그녀의 꿈이었던 스웨덴에 무료 학교를 건립할 기금을 마련해 주겠다며 미국 순회 공연을 제안한다. 제니가 승락하자 탁월한 기획 덕분에 순회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에서는 제니 열풍이 불었고, 관중들은 열광했다. 1850년부터 2년간 미국 동부와 남부, 쿠바, 그리고 캐나다에서 93번의 공연을 한다.
뉴욕에서는 경찰이 동원되어 과격한 관중을 통제했고, 보스턴 연주회장에서는 입장하지 못한 군중을 위해 건물 부속 탑에 올라 노래를 할 정도였다. 제니는 공연으로 엄청난 수익(천만달러 이상의 가치)을 올렸고, 대부분을 스웨덴의 공공학교 건립에 희사했다. 제니는 투어 도중 초청됐던 독일인 지휘자 오토 골드스미스와 결혼했고, 이후 영국에서 살았다. 오페라 출연은 사양했으나, 왕립음악학교의 성악과 교수로서 가끔 공연을 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한때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던 쇼팽의 음악이 연주됐다.
제니 린드의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는다. 많은 작곡가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헌정했던 곡은 남았으나, 축음기가 등장하기 전의 성악가 목소리는 기록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웃에게 헌신적이고 따뜻했던 그녀의 모습은 경쾌한 종소리로 남겨졌다. 19세기 영국인들은 제니 인형 종을 사랑했다. 자선 활동으로 감동을 준 아름다운 예술가를 가까이 두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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