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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성주 태실과 사고에서 찾은 역사의 향기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경북 성주군에는 조선 왕실의 뿌리를 보여주는 주요한 역사 유적들이 있다. 월항면에 소재한 세종대왕자 태실과 성주 사고가 대표적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녀가 출산하면 태(胎)를 백자 항아리에 담은 후, 명당을 찾아 태를 묻었다.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태아를 출산한 후에도 이를 소중하게 보관한 것이다. 태실(胎室)은 태를 봉안한 곳을 말한다.


조선 왕실의 태실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데, 성주군에 가장 많은 태실이 소재하고 있다. 그만큼 성주 지역이 조선시대부터 풍수지리적으로 명당터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세조실록'의 1462년(세조 8) 9월 14일의 기록에는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 즉위한 21년(1439년)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땅을 점치게 하고 대군과 여러 군의 태를 성주 북쪽 20리 선석산의 산등성이에 갈무리하게 하고 각각 돌을 세워 이를 표(標)하였는데, 주상(세조)의 성태(聖胎)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표하여 이르기를, '수양대군의 실(室)'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성주군 월항면에는 세종대왕의 적서 19명의 왕자 중 문종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 18기와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한 태실 1기가 조성되어 있다. 월항면 이외에도 성주군에는 가천면 법림산에 단종대왕 태실이, 용암면 봉산에 태종대왕 태실이 소재해 있다. 성주군은 전국 최대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자 태실 옆에 태실문화관과 함께 전국에 산재한 태실의 미니어처를 모아둔 생명문화공원을 조성했다. 태실 방식의 변화 과정 및 생명을 중시한 조선 왕실의 모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성주에 사고(史庫)를 설치한 것도 주목된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이 승하하면, 실록청을 구성하여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관청의 업무 일지에 해당하는 시정기(時政記)를 중심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이 완성되면, 4부를 간행하여 실록과 같이 중요한 국가 기록물만을 따로 보관하는 사고에 봉안했다. 조선 건국 후 사고는 궁궐 안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에 두었다가, 세종 때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실록을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하여, 완전히 소실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 것이었다. '세종실록' 1439년(세종 21) 7월 3일의 기록에는 "춘추관에서, '청하옵건대,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지어서 전적(典籍)을 간직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주에 태실과 사고를 조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세종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세종의 지시로 성주에 사고가 설치된 후에, '태조실록' 15권, '정종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본격적인 성주 사고 시대가 시작되었다. '성종실록'에는 실록을 바람과 햇볕에 말리는 작업인 포쇄(曝曬)를 위해 성주 사고에 관리를 파견한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성주 사고는 몇 차례 수난을 겪기도 했다. 중종 대에는 사고에 화재가 발생, 왕이 이를 크게 염려하여 발생 원인을 조사하도록 한 기사가 보인다.


결국 "관노(官奴) 종말(從末)과 그의 아들 말이(末伊) 등이 사고의 누각 위 중층(中層)에 산비둘기가 모여 잠자는 곳에서 불을 켜 들고 그물을 쳐서 비둘기를 잡다가 불이 창 틈으로 떨어졌고 비둘기 둥우리로 인하여 불이 났는데 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므로 걷잡을 수 없이 타버렸다"는 진술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성주 사고는 춘추관, 전주 사고와 더불어 소실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성주군은 성주 사고 복원과 더불어 읍성, 성벽, 북문 등을 복원하여 역사테마공원을 본격화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지인 태실, 사고와 더불어 역사를 담은 공간들이 복원되어, 성주군이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넘치는 지역임이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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