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준비를 전적으로 아내에게 의존하는 나같은 남편들이 혼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 등산이나 낚시 등 야외에서 간편하게, 한밤중에 출출하여 입이 궁금할 때, 그것도 아니면 왠지 그 매콤한 맛이 생각나서….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라면을 먹는다. 라면은 이제 우리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 되었다. 심지어 수천m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도 라면을 기내식으로 먹을 수 있으며, "제대로 익지 않았다" "너무 짜다"라며 여러 차례 퇴짜 놓은 모 대기업 간부의 사례처럼 라면은 간혹 갑질 도구로도 사용된다. 또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하듯이 남녀 간 수작 걸기에도 라면은 유용하다. 그 결과 한국인의 한 사람당 라면 소비량은 연간 70~90개 이상으로 라면의 원조인 일본과 중국의 2배에 달할 정도이다.
이렇게 라면은 이제 간편식, 기호 식품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라면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자취생은 다 굶어 죽었을 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라면은 아직도 어떤 이들에게는 비교적 싼값(물론 상대적이다)에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식품이기도 하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세 개나 딴 임춘애 선수는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구요"라는 우승 소감 때문에 '라면 소녀'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사실 임 선수는 이 별명이 억울하다. 비록 가난한 환경에서 운동했지만, 라면만 먹고 자란 것도 아니고 이 이야기도 임 선수가 직접 한 말도 아니다. 임 선수의 코치가 육상부의 열악한 환경을 이야기하며 "육상부에 지원이 부족해서 간식으로 라면만 먹는다"고 이야기한 것을 기자가 '가난을 극복한 영웅적 사연'으로 왜곡해서 "임춘애를 비롯한 육상부 선수들이 라면만 먹고 운동한다"라고 기사를 쓴 것이다.
그리고 영화 '넘버 쓰리'에서 배우 송강호에 의해 임춘애 선수의 라면은 헝거리 정신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이게 다 라면 먹고 이룬 거야. 뭐 복싱뿐만이 아니야. 그 누구야. 현정화, 현정화 걔두 라면만 먹고, 음? 금메달 3개씩 따버렸어."
"임춘애입니다. 형님!"
"……나가 있어."
아무튼 이후 임춘애는 많은 후원도 받았고 은퇴 후 국숫집 사장님이 되었다고 한다. 라면 때문일까?
그런데 라면에 얽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라면으로 허기를 면하려다가 불이 나서 중화상을 입고 투병 중이던 인천의 초등학생 형제 중 동생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엄마를 기다리며/ 라면을 끓여 먹는다/ 혼자 먹는 라면은/ 처음 반은 맛있는데/ 나머지 반은 맛이 없다/ 그래도 다 먹는다./ 그래야 잘 때 덜 배고프니까!'(김애란 시집 '난 학교 밖 아이' 중 '내가 라면을 먹는 이유' 일부)
오늘따라 유난히 이 시가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라면조차 못 먹고 간 아이, 부디 저 세상에서는 배곯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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