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가운데 책 읽는 소리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한글을 갓 배운 아이들이 책 읽는 소리다. 듣기에 답답할지 모르지만, 그 소리는 무엇과도 바꾸기 싫을 만큼 귀하고 귀엽다. 그게 만일 내 글이라도 되면 황홀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데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차츰 세상을 배워가면서 불쑥불쑥 내뱉는 말들은 그 자체가 시(詩)이다. 아이들의 말은 어른의 말과 달리 이것저것 재지 않는 단도직입이다. 하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어떤 고정된 틀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시라는 것은 구성이 이렇고, 글감이 이러하니 이런 식으로 전개하면 되겠지, 하는 틀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이 돼가는 것이겠다.
1학년 아이가 '풍선'을 소재로 쓴 시를 읽다가 부지불식간 완전 무방비 상태로 크게 한 방 먹었던 기억이 있다. 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풍선은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좋겠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이다. 이 아이는 마지막에 시인만의 개성을 보여 주고 있다. '풍선은 좋겠지만 나는 싫다. 하늘로 날아가면 엄마 아빠와 헤어지게 되니까.'라는 내용이었다. 이 시를 보는 순간 가슴속을 울리는 뭔가가 느껴졌다. 물론 "이게 뭐야, 시시하게." 이러는 분도 계시리라. 하지만 다시 한번 음미해보면 하늘 나는 재미와 부모와의 사랑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받은 감동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남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시는 울림이 크다고 하는 모양이다. 시는 짧아서 쓱 읽고 나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좀 정갈하게 만든 다음, 읽고 되새김을 하고 음미하다 보면 지금껏 살면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
얼마 전 작은 서점에 가보니 시집을 전시해두고 '시 한잔하시죠'라는 문구를 붙여 두었다. 그랬다, 역시 시는 그냥 읽거나 대충 보는 그런 게 아니었다. 시를 한잔하라니 정말 잔에 시를 가득 부어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을이라 그런지 요즘 라디오에서도 더 자주 시를 소개한다. 잔잔한 노래와 시는 정말 잘 어울린다.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음률과 시의 행간을 듣고 있자면 감성 충전 끝! 한해가 무르익어가는 즈음에 시를 호출하고 시인을 호명해 오는 것에는 무조건 찬성이지만 너무 가을에 몰아서 시를 남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술이 괜히 비집고 나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연애할 때 시 구절을 연인에게 읊어주기도 했다는데 어찌 보면 이것은 귀여운 오용(?)이 아니었던가.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 실린 시집은 많이 팔린다고 한다. 나도 서점 동시집 코너에서 어떤 책이 선택되고 있나 눈여겨본 적이 있다. 아쉽게도 동시집 코너에는 사람들이 잘 오지도 않을뿐더러 귀히 오더라도 문제집 고르듯 'O 학년이 읽으면 좋은 동시' 같은 책만 들여다보는 걸 보고 씁쓸하고 쓸쓸했었다.
독자들이여, 이 가을 부디 시를 외롭게 만들지 말아 주시라.
댓글 많은 뉴스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