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정재진 씨 모친 故 정복연 씨

아버지와 나락 벨 때 논두렁길로 새침 이고 오셔

재진 씨 어머니 정복연(왼쪽) 씨와 아버지의 생전 모습. 가족제공.
재진 씨 어머니 정복연(왼쪽) 씨와 아버지의 생전 모습. 가족제공.

거참. 밤이 점점 깊어간다. 오랜만에 붓을 들고 글 두어 장 써 놓고 정신 나간 듯 리클라이너에 누워 음악을 듣다가 불현듯 생각나는 엄마 생각에 나는 책상머리에 앉았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가을날 오후. 아버지와 나는 논에서 나락을 벤다. 이곳은 늘 물이 빠지지 않는 고래 논으로 크기는 두말반마지기(약 500평)정도였다. 반듯한 들판의 번답은 꿈도 못 꾸는 우리 집은 이나마 고래 논도 감지덕지다. 만일 이 논마저 없었더라면 식구들의 밥은 어찌 감당하겠는가. 좁다란 논은 세워 두면 하늘을 찌른다는 말처럼 길쭉하게 생긴 데다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물을 빼보려 해도 언제나 그대로인 그런 곳이었다.

사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논의 물을 빼려고 일하실 때마다 화를 내셨다. 아마도 당신의 힘에 부치신 것 같다. 물이 그득한 볏짚을 옮겨 널어놓는 것도 참 힘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힘겨운 일을 하다 허리춤을 펼 때면 어느새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백철 대야를 머리에 이고 좁은 논두렁 길을 걸어오시는 어머니가 보이면, 힘들어하던 우리 부자의 눈에는 반가움이 넘쳐난다.

그랬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존재 그 자체로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어머니. 동그란 얼굴에 한평생 한복을 입으셨던 우리 어머니는 녹전 댁 이다. 그분의 성함은 정복연씨다. 가장골 평천댁 열한 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이다.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외할아버지 또한 키가 작으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닮으신 모양이다.

​멀찍이 어머니가 보일 때부터 나는 벌써 논두렁길을 달려간다. 그리고 키 작은 어머니의 머리에 얹혀 있던 가을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백철 대야를 받아 안고 위태로운 논두렁 길을 달려, 우리 세 식구는 둑에 앉아 맛있는 새참을 먹는다. 사실 새참이라야 별것은 없다. 술 한 주전자. 하지만 술을 잡숫지 못하시는 아버지에게는 소용없는 음식이다.

아버지 몫은 삶은 감자 정도. 그때 먹었던 밀가루로 빚은 막걸리의 맛은 천국의 맛이었음을 다 늦은 지금에야 나는 깨닫는다. 그날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먹는 것을 황홀한 듯 쳐다보셨음을 나는 기억한다. 제법 자란 아들이 아버지와 일을 하는 것을 흐뭇해 하시면서도 간혹 '우리 재진이가 이래(이렇게)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되는데'하시면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시던 것도 기억난다.

지난 7월 어머니 제삿날쯤에는 연일 비가 내렸다. 어머니는 나의 품속에서 세 시간 만에 저 먼 곳으로 떠나가셨다. 그날도 참 비가 많이 내려 더욱 생각난다. 언제나 그렇지만 어머니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자식에게 있어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존재란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며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다.

또 나의 존재를 알아주고 격려해 주신 분이다. 다들 그렇겠지만, 유난히 어머니를 따랐던 나에겐 그의 존재는 천하 그 자체였다. 어머니가 기뻐하면 천하가 기뻐 웃었고, 어머니가 슬퍼하면 천하가 울었으니 말이다. 그 어른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못할 것은 없었다. 나의 보잘것 없는 나무지게를 맞이하시면서 '우리 아들이 온 산을 짊어지고 오네'라고 하시며 얼굴 가득 인자한 웃음을 가득 지으시던 그리운 어머니. 그 어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메마른 눈에서는 이슬이 맺히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멘다.

어머니는 지난밤처럼 보름달이 떠오르면 맑디맑은 정한 수 한 그릇을 소반 위에 놓으시고 우리 형제의 안위와 집안의 화평을 기원하셨다.​ 그랬다. 세상에 다시 없는 우리 어머니였었다. 자식을 위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치 않으신 그 깊고 넓은 애정을 어디에다 비견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보름달이 떠 오르는 날이 보름이다. 오늘 아침 보름나물로 나온 피마자 나물을 보면서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런 어머니가 ​한 없이 그립다. 그리고 사무치게 보고 싶다. 하지만 죽음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만든다.

어머니(정복연)를 그리워 하는 아들(정재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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