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참. 밤이 점점 깊어간다. 오랜만에 붓을 들고 글 두어 장 써 놓고 정신 나간 듯 리클라이너에 누워 음악을 듣다가 불현듯 생각나는 엄마 생각에 나는 책상머리에 앉았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가을날 오후. 아버지와 나는 논에서 나락을 벤다. 이곳은 늘 물이 빠지지 않는 고래 논으로 크기는 두말반마지기(약 500평)정도였다. 반듯한 들판의 번답은 꿈도 못 꾸는 우리 집은 이나마 고래 논도 감지덕지다. 만일 이 논마저 없었더라면 식구들의 밥은 어찌 감당하겠는가. 좁다란 논은 세워 두면 하늘을 찌른다는 말처럼 길쭉하게 생긴 데다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물을 빼보려 해도 언제나 그대로인 그런 곳이었다.
사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논의 물을 빼려고 일하실 때마다 화를 내셨다. 아마도 당신의 힘에 부치신 것 같다. 물이 그득한 볏짚을 옮겨 널어놓는 것도 참 힘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힘겨운 일을 하다 허리춤을 펼 때면 어느새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백철 대야를 머리에 이고 좁은 논두렁 길을 걸어오시는 어머니가 보이면, 힘들어하던 우리 부자의 눈에는 반가움이 넘쳐난다.
그랬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존재 그 자체로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어머니. 동그란 얼굴에 한평생 한복을 입으셨던 우리 어머니는 녹전 댁 이다. 그분의 성함은 정복연씨다. 가장골 평천댁 열한 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이다.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외할아버지 또한 키가 작으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닮으신 모양이다.
멀찍이 어머니가 보일 때부터 나는 벌써 논두렁길을 달려간다. 그리고 키 작은 어머니의 머리에 얹혀 있던 가을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백철 대야를 받아 안고 위태로운 논두렁 길을 달려, 우리 세 식구는 둑에 앉아 맛있는 새참을 먹는다. 사실 새참이라야 별것은 없다. 술 한 주전자. 하지만 술을 잡숫지 못하시는 아버지에게는 소용없는 음식이다.
아버지 몫은 삶은 감자 정도. 그때 먹었던 밀가루로 빚은 막걸리의 맛은 천국의 맛이었음을 다 늦은 지금에야 나는 깨닫는다. 그날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먹는 것을 황홀한 듯 쳐다보셨음을 나는 기억한다. 제법 자란 아들이 아버지와 일을 하는 것을 흐뭇해 하시면서도 간혹 '우리 재진이가 이래(이렇게)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되는데'하시면 걱정스러운 눈길을 주시던 것도 기억난다.
지난 7월 어머니 제삿날쯤에는 연일 비가 내렸다. 어머니는 나의 품속에서 세 시간 만에 저 먼 곳으로 떠나가셨다. 그날도 참 비가 많이 내려 더욱 생각난다. 언제나 그렇지만 어머니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자식에게 있어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존재란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며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다.
또 나의 존재를 알아주고 격려해 주신 분이다. 다들 그렇겠지만, 유난히 어머니를 따랐던 나에겐 그의 존재는 천하 그 자체였다. 어머니가 기뻐하면 천하가 기뻐 웃었고, 어머니가 슬퍼하면 천하가 울었으니 말이다. 그 어른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못할 것은 없었다. 나의 보잘것 없는 나무지게를 맞이하시면서 '우리 아들이 온 산을 짊어지고 오네'라고 하시며 얼굴 가득 인자한 웃음을 가득 지으시던 그리운 어머니. 그 어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메마른 눈에서는 이슬이 맺히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멘다.
어머니는 지난밤처럼 보름달이 떠오르면 맑디맑은 정한 수 한 그릇을 소반 위에 놓으시고 우리 형제의 안위와 집안의 화평을 기원하셨다. 그랬다. 세상에 다시 없는 우리 어머니였었다. 자식을 위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치 않으신 그 깊고 넓은 애정을 어디에다 비견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보름달이 떠 오르는 날이 보름이다. 오늘 아침 보름나물로 나온 피마자 나물을 보면서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런 어머니가 한 없이 그립다. 그리고 사무치게 보고 싶다. 하지만 죽음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만든다.
어머니(정복연)를 그리워 하는 아들(정재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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