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두 발만 내놓고 온통 법의로 가린 달마의 모습을 전신입상으로 그렸다. 제목을 '서래진의(西來眞儀)'라고 쓰고 옆에 '강석(江石) 상공대인(相公大人) 법공양(法供養)'을 위해 그렸다고 했다. 서명은 '불제자(佛弟子) 백련(白蓮) 지운영(池運永)'이다. 몸이 감추어져 신비감이 감도는 가운데 발은 맨발이고, 얼굴은 부리부리한 눈에 짙은 눈썹과 짧은 콧수염 턱수염이 험상궂다. 원래는 준수한 미남이었는데 잠시 유체이탈한 후에 돌아와 보니 이 몸밖에 들어갈 데가 없어서 이런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인도인인 달마의 생김새에 대한 중국 화가들의 상상이 달마상의 원형이 되었을 것이다.
제목에서 서래는 서쪽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달마를 가리키고, 진의는 초상이라는 뜻이다. 지운영은 달마를 그리고 '서래진의'로 이름 붙였으며 1921년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서래진의출현지연기」라는 글에서 달마 성상(聖像)을 그리게 된 인연을 서술하고 자신의 달마상이 "좋은 약이 되어 능히 금빛으로 흑기(黑氣)를 없애리라"는 주술적 희망을 나타냈다. 옷 주름을 굵직하면서 느긋한 붓질로 중후하게 나타내면서 꺾이는 부분에 점을 찍듯 과장되게 표현했다. 푸른 기가 감도는 엷은 잿빛 법의와 얼굴과 발의 살빛은 진채인 듯 담채인 듯 오묘한 착색 효과를 내고 있다. 달마도 중에서 배경이 없는 드문 전신상이다.
'서래진의'는 강석이라는 특별한 소장자를 위한 법공양으로 그려졌다. 불경을 보시하거나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법공양은 재물로 승가를 받드는 재공양(財供養)보다 공덕이 더 크다고 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교의로 하며 법문과 불경 없이 참선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선(禪)불교에서 선종화, 선화는 선승과 불제자들의 법공양이었다. 지운영 또한 불제자로서 법공양으로 선종을 개창한 초조 달마를 그린 것이다.
강석은 한규설(1848-1930)의 호이다. 을사늑약 당시 참정대신이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대신들을 모아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위협적으로 가부를 물었을 때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 2명만 반대했고 나머지 7명은 모두 찬성했다. 고종황제는 병을 핑계로 내전에 머물며 이 어전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한규설은 곧 파면되었고 칩거하다 1920년 월남 이상재 등과 조선교육회를 설립해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키는 등 구국운동에 헌신했다.
지운영은 왜역관 집안 중인으로 사진술 도입, 개화 관련 정치활동 등을 하다 50대 이후 서화에 전념하는데 회갑이 되던 해 관악산 삼막사 위에 백련암을 짓고 이후 여기에서 살았다. 근대 화단의 쌍벽인 안중식에 이어 조석진마저 타계한 1920년 지운영은 69세였는데 이 무렵부터 84세로 작고할 때까지 가장 명망 높은 화가 반열에 있었다. 그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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