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진숙의 영국이야기] 걷기는 영국인의 오래된 일상이다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영국은 조용한 나라다. 온갖 소음으로 번잡한 런던에서도 모퉁이만 돌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걸어서 마을센터에 갈 수 있는 시골은 더 조용하다. 작은 집들이 벽을 공유하며 닥지닥지 붙어있는 골목이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조용하고, 바비큐의 연기 냄새가 주말을 알린다. 열린 창문 사이로 화장실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신경이 쓰일 정도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하지?" 하고 물으니, 남편도 "그러게. 우리는 이렇게 조용하진 않지. 무슨 소리가 나도 나지" 한다.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전원이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나지막한 구릉과 낡은 돌담이 오랜 시간 함께 만들어낸 풍경은 그림 같다. 탁 트인 광활한 녹지가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공원에는 가게나 화장실 같은 편의시설이 없고, 넓은 잔디밭과 우람한 나무 사이에 벤치와 쓰레기통만 띄엄띄엄 있다. 아름드리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는 남자와 곁에 엎드린 개가 평화롭다. 멀리서 사람을 부르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없고, 화를 내는 사람도 뛰는 사람도 없다. 아이는 칭얼대거나 떼를 쓰지 않으며, 목줄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개는 사람에게도 개에게도 짖지 않는다.

영국인은 걷기를 좋아한다. 웬만한 볼일은 걸어서 가고, 노인들도 장을 보러 걸어서 간다. 비가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산도 없이 걷는다.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유독 혼자 걷거나 개와 함께 산책한다. 산책길은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기 좋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사색하고, 분주한 일상에서 빠져나와 제자리를 찾아가기에 좋다. 그 고즈넉함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여야 한다.

혼자라면 살짝 겁날 것 같은 한적한 길에 '조용히 즐길 수 있는 곳'(quiet place to enjoy)을 알려주는 작은 표지판이 있다. "아니, 영국에서는 이런 곳도 알려주나?" 했는데, '더 조용한 곳'(quieter place)을 가르쳐주는 지도까지 있다. 세상의 소음과 방해로부터 벗어나 잠시 조용히 있어보라고 안내한다. 침묵의 공간에서 내면을 충전하고 평화를 얻어가라 한다.

"Silence is important for English people." 침묵이 중요하다는 사람들은 이웃도 가게도 없는 드넓은 들판 위에 홀로 떨어진 집에 산다. 조용한 곳에 살면서도 일상 속에 침묵을 넣고, 휴가는 더 조용한 곳으로 떠난다. 30여 년 전, "휴가를 가면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내게 영국 친구는 "걷는다"고 했다. 우리에게 휴가란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하는 것인데, 거기까지 가서 걷는다니 의아했다.

걷기는 삶을 천천히 즐기는 방법이다. 속도와 효율과는 거리가 먼,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삶의 방식이다. 후닥닥 건너뛰지도 않고 휘리릭 지나치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자신'이라는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다. 온갖 소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현대인의 삶은 바쁘고 복잡해졌다. 나는 가끔 '이제 세상이 그만 발전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넓은 들판을 걷고 활보하며 기쁨을 얻는다. 나무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흙길에서 아늑함을 느낀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직접 보고 느끼며 진정한 삶의 여유를 경험한다. 걷기는 겸손하고 소박하며, 복잡하고 미묘하다. 걷기는 영국인의 오래된 일상이고, 매우 영국인다운 일상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