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경주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조기 폐쇄를 결정하면서 '주민 수용성 검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 정부가 추진했던 울진 신한울원전 1~4호기와 영덕 천지원전 1·2호기 건립 결정을 현 정부가 백지화하면서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원전 또는 건립 예정지 주변 주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강조한 '민주주의의 숙의' 절차를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주민 의견을 배제한 채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으로 지역 사회는 또 한 번 분열이 불가피하게 됐다.
◆"정부, 주민 의견 최우선 한다더니…배신감"
"월성 1호기 조기 폐쇄가 불합리하고 부당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부는 월성 1호기를 재가동하고, 주민 수용성 없는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라!"
월성원전 1호기 일대 주민 단체인 동경주발전협의회는 지난달 27일 경주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산업통상자원부·한국수력원자력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때 주민 의견을 따로 수렴한 적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에게 탈원전 필요성을 설득하거나 원전 입지 주민에게서 '탈원전 부작용' 등 의견을 듣는 과정을 생략했다는 얘기다.
주민들은 "탈원전을 주장하는 목소리만큼 원전 존치 필요성을 요구하는 주민도 많다. 정부는 이런 여론을 묵살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은 감사원의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감사' 결과로 촉발됐다. 산업부·한수원이 경주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결정 당시 검토 대상이었던 ▷경제성 ▷안전성 ▷주민 수용성 가운데 경제성만 중점으로 살핀 게 도마에 올랐다.
실제 한수원 이사회의 2018년 제7차 회의록을 보면 지역 수용성을 논의하면서 "지역 지원금 감소 우려에 따른 갈등이 예상되므로 지역 지원금 영향 등에 대해 지역 주민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고만 논의했다. 지역 주민들의 반응을 고려치 않고서 탈원전 사후 대응책만 검토한 셈이다. 주민들도 "2017년 이후 지역 수용성을 조사한 사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는 월성 1호기 폐쇄 여부 결정에 앞서 '주민 의견을 수렴한다'는 방침을 명시한 바 있다. 산업부가 작성한 제8차 전력수급계획(2017년)에 따르면 정부는 가동 중단했던 월성 1호기에 대해 '내년(2018년) 상반기 중 경제성, 지역(주민) 수용성 등 계속 가동에 대한 타당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폐쇄 시기 등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경주시 관계자는 "원전 관련법은 원전 폐쇄 때 관계 당국이 주민 수용성을 조사해야 한다는 항목이 없다. 기피시설인 원전을 폐쇄할 때는 주민 수용성을 조사할 필요는 없다는 게 일반적 통념이기도 하다"며 "그럼에도 정부는 제8차 전력수급계획에 '주민 수용성'을 강조했다. 그간 원전을 조기 폐쇄한 전례가 없던 만큼 주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풀이했다.
주민들은 정부가 주민 의견을 묵살한 점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동경주발전협의회 소속 한 주민은 "정부가 2017년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발표한 당시 산업부, 한수원을 방문해 항의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 정부는 주민 수용성을 최우선 한다고 했지만 단 한 번도 협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부푼 꿈 심을 땐 언제고…약속 어기면서 주민 뜻도 무시하나"
울진군과 영덕군 주민들도 정부가 주민 수용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탈원전 필요성에 대해서는 주민 간 이견이 있지만, 원전 건립을 갑자기 멈추거나 취소하려면 주민과 최소한의 소통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울진군 주민들은 원전을 완공하고 연료 장전(운영허가)만 앞둔 신한울 1·2호기, 설계와 부지 터파기까지 마친 신한울 3·4호기, 기존 한울원전 6기까지 총 10기 원전을 가동해 지역의 미래 경제 성장 동력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신한울 1~4호기 가동·건립이 가로막혔고, 울진군이 정부·한수원 도움을 받아 지역 인프라를 개선하려던 '8개 대안사업'(총 사업비 2천800억원)도 일시에 중단됐다.
주민들은 울진범군민대책위원회를 꾸려 국민 서명을 받는 등 신한울 3·4호기 건립 재개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앞서 '원전 건립 반대'를 주장했으나 "이미 확정한 원전까지는 모두 지어 지역 발전의 디딤돌로 활용하자"며 대책위에 참여한 사례도 있다.
이희국 북면발전협의회장은 "주민 상당수가 탈원전 필요성에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이미 수십 년간 원전의 안전성과 경제적 혜택도 체감하고 있다. 지금 정부 정책은 주민들이 대응할 새도 없이 너무 급작스럽게 바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원전을 지을 때는 주민 의견을 듣는다며 찬성과 반대 의견이 대립하게 만든 정부가 탈원전을 할 때는 왜 아무런 의견도 듣지 않는지 의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덕군은 정부가 2012년 결정한 '전원개발예정구역 고시' 해제를 두고 주민 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정부가 '예정구역 고시' 해제 여부를 명확히 밝히고, 주민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주민 이영운(가명·58) 씨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도 오락가락한 탓에 애꿎은 주민만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원전 설치 당시 정부는 '주민 수용성'을 파악한다면서 주민 전체 찬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일부 대표 의견만 받아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탈원전을 하면서도 주민 의견은 싹 무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책을 되돌릴 때도 주민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주민·국민 공론화 했나…지역 이익 감소 영향 살펴야"
산업부는 관련법에 따라 원전 조기 폐쇄 또는 전원구역 고시 해제 등 과정에서 주민의 의견을 듣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다.
경주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관련, 주민 수용성 평가 책임을 한수원에 떠넘기면서도 '평가'한다는 것이 곧 '조사'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8차 전력수급계획 문건에는 월성 1호기 주민 수용성 평가 주체가 누구인지 적혀 있지 않은데, 주체는 산업부가 아니라 한수원이다. 또 '주민 수용성을 조사한다'고 명시한 것이 아니며 관련법상 그럴 의무도 없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정부가 원전 영업 허가를 앞두고 주민 수용성을 조사할 때 주민들은 원전 위험성과 실익을 고려한다. 실익에는 원전을 유치하면서 얻을 수 있는 지원금, 국책 사업 등 지역 경기 견인책이 포함된다.
이를 고려한 주민 수용성이 높아 원전 설치를 확정했다면, 정부는 추후 원전을 조기 폐쇄하거나 계획을 백지화할 때도 주민들로부터 원전 사고 위험 상존, 지역 지원금 감소 관련해 의향을 조사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남홍 경주시 원전범시민대책위원장은 "세계적으로 대표적 탈원전 국가인 독일과 스위스, 벨기에는 각각 탈원전을 본격 시작하기에 앞서 26년, 33년, 4년간 공론화를 하고 대체 에너지원도 확충했다"면서 "지금처럼 정책을 급선회하는 것은 갈등·불안을 감내해 가며 지역 발전을 꿈꾸던 주민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원전은 장치산업으로, 초기 많은 비용을 투자한 뒤 오랜 기간 열매를 취해야 이득이다. 다른 나라들은 원전의 높은 발전 효율과 경제성을 고려해 안전성 등 관련 기술을 확충하고, 보강한 원전은 한 번에 20년씩 수명을 늘리는 식으로 원전 시설을 극대화한다"며 "우리나라도 원전 안전성을 꾸준히 확충만 했어도 충분히 투자비용을 회수하고 지역 균형발전에도 보탬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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