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집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격차, 빈부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격차에서 오는 소외와 차별, 냉소와 분노, 체념도 심각하다.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졌다.
'기회균등의 사다리'라 여겨졌던 교육마저 이제는 '신분세습의 도구'가 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386세대는 왜 자신들이 부르짖던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세습'을 선택했을까? 그것을 단순히 운동권의 변질이나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망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우리 사회가 기존의 기득권 구조가 낳은 격차의 문제를 전혀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분피라미드'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능력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능력주의는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룰로 받아들여진다. 능력에 따라 달리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맞는 말 같다. 하지만 그 능력이 이미 결정된 것이거나 세습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실상은 세습으로 획득된 신분이 능력으로 포장돼 우리 사회의 격차를 더욱 좁힐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영역은 물론 시민운동마저도 '능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앞에 공고히 서 있는 '신분피라미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있음을, 또 여기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여러 자료를 토대로 이야기한다. '강원랜드 채용비리'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힘이 곧 능력임을 증명한 대표적 사례다. 이 사건의 전모와 판결 결과를 들여다보면, 평범한 시민들은 심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이 제공하는 '능력'을 넘어설 수 없다는 현실 장벽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하며 파업과 국가고시 거부를 선언했던 전공의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는 카드뉴스에서 '전교 1등' 운운했다가 전 국민의 반감을 샀다. 이들의 '능력주의'는 의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신분이 뒷받침된 '능력 있는 자'들과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의,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쪼개질지 모른다. 이 책은 바로 이 나라의 이런 상황에 대한 직시이자 질문이다.
법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의 나라를 전제한 법은 이렇게 분리된 상황에서 죄는 인정되나 유죄를 증명할 수는 없다는 식의 형식적 개입밖에 할 수 없다. 이렇게 분리된 두 나라를 다시 합치는 것이 정의이고, 공정함은 그 뒤에나 따질 수 있는 가치다.
이 책은 한국 사회를 '신분피라미드사회'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만큼 신분에 대한 복종심도 크고, 격차가 커지는 만큼 신분에 대한 집착도 강해진다.
저자는 "지금 필요한 것은 일시적 조치가 아니라 격차를 메우면서 신분피라미드를 바꾸는 것이다. 단순히 신분을 순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로 포장된 신분피라미드 자체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216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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