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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전태일, 그리고 김광석

전태일, 김광석. 매일신문 DB
전태일, 김광석. 매일신문 DB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50년 전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근로기준법 책을 낀 청년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길에 맡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구호를 외치던 청년은 쓰러지기 직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산화한다.

1948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그는 초교 2년, 고등공민학교 1년 외에는 배움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1965년 평화시장 한 피복공장의 미싱 보조로 취업한 열일곱 소년. 지금의 특수고용 노동자인 셈이다. 노동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여공들의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감시하고, 견습공(시다)들에겐 잠 오지 않는 약을 먹이기도 했다. 하루 평균 15시간 노동. 청년은 열악하고 부조리한 노동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다. 미싱사 여공이 입에서 핏덩이를 토해내는 것을 보고서 노동운동에 본격 뛰어든다.

1969년 재단사 친목 모임 '바보회'를 만든다.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도 바보같이 부당한 학대를 받아왔고, 주변에서 권리 실현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하니 '바보같이 들이박아나 보고 죽자'는 취지에서 만든 이름이다. 평화시장 노동 실태를 조사한 뒤 개선 방안을 시청 근로감독관에게 전달하지만, 씨도 먹히지 않는다. 회사에선 곧바로 해고된다.

이듬해 다시 재단사로 취직한 그는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노동 조건 개선 투쟁에 나선다.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제출해 선처를 약속받는다. 하지만 약속 기한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급기야 동료들과 피켓 시위를 계획한다. 경찰은 시위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강제해산시킨다.

청년은 급기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긴다. 이를 계기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된다. 그해 2천5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진다. 숭고한 죽음의 대가였다.

5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상당수 기업의 노동 조건은 크게 개선됐다. 높은 연봉을 받으며 자사 비정규직이나 다른 산별노조에 횡포를 부리는 귀족노조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비정규직이나 영세사업장,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여전히 청년 전태일의 전철을 밟고 있다. 충분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청년 전태일의 외침을 다시금 되새겨 봐야 할 때다.

"행복하십시오." 노래하는 철학자, 김광석.

1964년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 번개전업사에서 태어난 그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대변했다. 대학시절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며 민중가수로 출발했다. 동물원 보컬, 솔로를 거치면서 발라드와 포크 음악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광야에서' '서른 즈음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먼지가 되어' '일어나' 등 주옥같은 노래를 남겼다.

전태일이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처절한 삶을 살았다면, 김광석은 삶에 지친 이들을 노래로 위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태일 가족이 세 들었던 남산동 옛집을 시민의 힘만으로 매입해 문패를 달고 '전태일 기념관'으로 조성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방천시장에 조성된 김광석 거리는 전국의 눈길을 받으며 이미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20대, 30대 초반에 각각 요절한 두 사람은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모두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 인물이다.

코로나19로 일상이 힘든 때, 전태일 열사와 김광석을 그리며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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