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동을 걷다, 먹다] 7. 숨어있기 좋은 책방

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가일서가
가일서가
안동 책마을 지도
안동 책마을 지도

7. 동네책방(마리서사, 가일서가, 모메꽃 책방)을 가다

숨어있기 좋은 방.

아주 어린 시절 나는 시골집 다락방에 혼자 올라가서 형과 누나들이 읽은 헌 책들 속에 파묻혀 좋아하는 보물같은 만화책을 찾아내 읽는 놀이를 즐겼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교 앞 '골방 같은' 술집에 들어앉아 '해전사의 인식'같은 금서들을 한 두 권 깔아놓고 토론하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회사를 다닐 때는 점심을 먹으러 나온 효자동 뒷길 막다른 골목집 '천장 높은' 칼국수집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칼국수와 파전을 시켰다. 책읽기 좋은 날들이었다. 물론 그날 오후 내내 책은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햇살이 좋은 그런 날에는 그 눈부신 햇살을 피한다는 핑계로 다시 그 집에 책 한 권 들고 숨어 들어가곤 했다.

안동 책마을은 폐교 전체를 책방으로 만들었다.
안동 책마을은 폐교 전체를 책방으로 만들었다.
책마을 이정표
책마을 이정표

▶책마을, 마리서사

가을이다. 책읽기 좋은 계절이다.

한 번 가본 듯한 그런 '숨어있기 좋은 책방'을 만났다. 차 한 잔 마시면서 하루 종일 이 책 저 책 뒤적이면서 숨바꼭질을 하듯 이 방 저 방 다니다가도 심심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호수에 눈을 한 번 씻고 나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아득해지는 그런 책방이 있다.

역사의 향기 물씬 풍기는 오백년 고택에서 차의 향기를 맡으면서 책 읽는 호사는 어떤가? 혹은 '이육사 시인'의 시를 따라 산골마을, 소박한 시인의 책방을 찾아나서는 여행도 괜찮다.

'교보문고'같은 대형서점은 이제 잊어라.

우리가 동네책방에 여행을 가는 이유가 생겼다.

이 가을, 한권의 책을 사서 읽어야 할 이유는 매일같이 차고 넘친다.

책마을, 마리서사
책마을, 마리서사

책마을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책마을'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폐교된 와룡 도곡초등학교를 통째로 책방으로 만들었다. 와룡면 소재지에서도 구불구불 고갯길을 20여분 곡예운전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고개마루에 올라서자 발 아래 호수가 보였고 학교건물이 나타났다.

안동 책마을, '마리서사'다.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이 운영한 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를 본따 만든 '책마을'은 도서관 사서를 하던 박상익 씨가 이 폐교를 매입, 조성한 거대한 '책방'이다. 헌책방이다. 2층짜리 학교건물 전체를 책창고로 꾸몄다. 서가를 꾸미다가 만 듯, 교실마다 제각각 쌓여있는 책무더기 사이로 보고 싶은 책을 찾아다니는 여정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 흥미롭다.

도대체 몇 권의 책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뒤죽박죽인 듯 하지만 어떤 교실에 들어가면 질서정연하게 서가에 가지런하게 잘 정돈이 돼있기도 했다. 간혹 귀중한 책들이 눈에 뜨이면 신대륙을 발견한 듯 기뻤다. 헌책방을 찾아 나서는 여행에는 그런 묘미가 있다.

안동시내 자리잡은 마리서사, 오로지 책
안동시내 자리잡은 마리서사, 오로지 책

오래된 책에선 향기가 난다.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맨얼굴을 만나듯, 생경하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한, 그리운 그 시절 역사가 배어있는 책들이다. 책장을 살짝 넘겨 저자의 친필사인이나 책을 소장했던 사람의 온기를 발견하면 더 더욱 반갑다. 소장하고 싶은 욕망은 배가된다. 그렇게 헌책을 뒤적거리다가는 책방은 하루 안에 다 둘러보지도 못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당신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지뢰밭이 될 수도 있다.

교실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가을 날 저녁놀을 보면 자칫 오늘은 책을 보면서 여기서 하룻밤 묵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면 지체없이 주인장에게 무심하게 요청해보라.

교실 한 칸은 책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로 온전하게 내어줄 준비가 돼있었다. 하루를 온전하게 책들에게 할애할 여유가 있다면 와룡 책마을 여행을 선택하라.

안동시내 골목길에 자리잡은 '마리서사, 오로지 책'에서는 이 책마을에서 뽑혀져 나온 책들을 파는 '안테나숍' 같은 책방이다.

이 산속 책마을은 화, 목, 토요일에만 열리고, 나머지 절반인 월, 수, 금요일에는 시내 헌책방 '마리서사. 오로지 책'에 가야 한다.

가일서가

작은 책방 하나 내서 하루종일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것이 어릴적 '로망'이었던 적이 있다. '가일서가'는 그런 책읽는 삶을 고택에 실현시킨 '몽환적인 책방'이다.

그 곳은 여전히 조선시대 선비들이 공부하고 있는 듯한 고색창연한 고택이었다. 경상북도 도청이 들어선 안동시 풍천의 유서깊은 '가일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고택, 노동서사였다. 일제하 노동운동,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회주의자 권오설 선생의 체취가 가득한 고택이다.

문중의 허락으로 이가람 대표는 1년간 고택을 수리하는 수고를 마다않고 이곳에 책방을 열수 있었다.

가일서가
가일서가

가일서가는 책만 파는 책방이 아니라 지역민과 함께 하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한다. 이 집의 주인이었던 권오설 선생이 '원흥학술강습소'를 열어 이웃주민들을 교육을 하고 노동조합 운동, 독립운동을 주도하셨듯이, 이 대표는 마을 아이들을 위한 영어교실과 마을주민들과 함께 하는 책읽기 등 여러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가일서가를 프랑스의 '꼬뮌'처럼 지역사회 문화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포부가 읽힌다. 책 읽고 글쓰기까지 지도하면서, 출간을 도와 인세(印稅)를 돌려주는 기쁨도 주고 있다.

판매하는 책은 주로 인문서다. 책방 주인이 선정한 책은 한 권 한권 예쁘게 포장이 돼있어서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예쁘다. 책은 구입해서 자기가 원하는 공간에 '짱박혀서' 차분히 독서하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단 수다는 금물이다.

가일서가는 예약제로 운영한다. 고택이라는 공간 탓에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없고 책을 읽고 차를 마시는 공간이라 어쩔 수 없는 예약제다. 주말에는 예약하지 않아도 방문할 수 있다.

▶모메꽃 책방

이육사 시인의 '초가'라는 시에는 "...가시내는 가사내와 종달새 소리에 반해 빈 바구니 차고 오긴 너무도 부끄러워 술래짠 두 뺨 우에 모매꽃이 피었고...."라는 싯구가 나온다.

'모메꽃'은 매꽃의 안동사투리다. 들판 지천으로 피는 모메꽃은 가시내가 부끄러우하듯 한낮에는 활짝 핀 모습을 볼 수 없다. 밤이나 이른 새벽에 피었다가 해가 뜨면 '부끄러워' 스르르 꽃잎을 오므린다. 나팔꽃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소박한 꽃이다.

안동에서 도산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와룡 이하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모메꽃 책방'은 육사지킴이로 유명한 이위발 시인이 마련한 소박한 책방이다.

모메꽃책방
모메꽃책방
모메꽃 책방의 이위발 시인
모메꽃 책방의 이위발 시인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고향 영양 언저리인 안동에 내려 온 그는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문학관 활성화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시작(詩作)활동을 하는 틈틈이 평생 소원인 문학학교를 마련하는 대신 이육사 문학관에서 이육사 선생을 알리고, 대신 와룡의 소박한 책방을 꾸리는 것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 책방 한 켠에는 이 시인 부인의 염색공방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모메꽃은 안동정서와 닮아 있습니다. 나팔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들판 지천에 핀 소박한 꽃인데다, 새벽에 몰래 핍니다. 작은 책방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고 육사의 시에도 나오는 꽃이라 모메꽃 책방이라 이름을 지었지요."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모메꽃 책방의 책은 주로 이 시인이 소장하던 인문도서와 시집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구성돼있었다. 책을 사지 않더라도 커피와 차를 마셔도 좋다. 모메곷 책방에 앉으면 통창으로 보는 가을 들판 풍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산 아래에서 나무들이 바람에 후두둑 떨어지는 풍경이 시(詩)보다 더 시적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시인은 문학관에서 근무하느라 월요일에만 만날 수 있고 평소에는 그의 아내가 책방을 지키며 염색공방까지 함께 운영한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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