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최원대 씨 母 김두남 씨

강인함 몸소 보여주신 덕에 청소년기 시련 잘 이겨내

1985년 가톨릭대병원 병실에서 김두남(오른쪽) 씨가 갓 태어난 최원대 씨의 첫아이를 보며 웃고 있다.가족제공.
1985년 가톨릭대병원 병실에서 김두남(오른쪽) 씨가 갓 태어난 최원대 씨의 첫아이를 보며 웃고 있다.가족제공.

어젯밤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다. 유년 시절 제 기억에는 어머니는 여장부이셨다. 결혼 후 서울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해 4남매를 낳으시고 키우셨다. 과묵하셨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무척 사교적이셨고 성격 또한 호탕하면서 리더쉽도 있으셨다. 4남매 중 둘째로 외아들이었던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잘나가는 서울깍쟁이 자모들 속에서 당당히 자모회장으로 선출돼 치맛바람을 주도하셨다.

덕분에 키가 작았던 나였지만 초등학교 3학년까지 반장도 해보고 선생님들의 총애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어머니는 음식 솜씨는 물론 패션 감각까지 남달라 아래 위 새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올빽 머리에 진한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교무실에 나타날 때면 선생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셨다. 봄가을 학교에서 소풍이라도 가는 날이면 평소 요리학원에서 배운 솜씨로 선생님들의 도시락도 함께 준비해 모두의 입을 즐겁게 하곤 하셨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잇따라 실패하자, 어렵게 중학교를 마친 나는 결국 부모님을 따라 낙향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구로 내려온 식구들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이때도 어머니는 사교성과 음식솜씨를 발휘해 근처 공장에 다니는 타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숙집을 시작해 어려운 집안 살림을 이끌어 나가셨다.

중학교 졸업 후 1년 넘게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하고 하숙생이 다니는 공장에서 일을 배우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는 남자가 최하 고등학교는 나와야 깨끗한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서, 외갓집에 부탁해 나를 지역에 있는 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편입시키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이제부터 학비는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졸업하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나는 어머니의 당부대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 가면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온실 속에서만 컸던 나는 미성년임에도 힘든 사회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딸 셋에 아들 하나로 당시만 해도 남자가 귀한 집안이였지만 나의 어머니는 아들 편애는 고사하고 오히려 누이와 싸울 때면 이유를 불문하고 언제나 나에게 먼저 회초리를 대셨다. "하나 아들 효자 없다 카더라" 라는 말씀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기억이 난다.

이러한 유년기를 보낸 나였기에 일찍이 닥친 시련이었음에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학비는 못 주니 이제부터는 알아서 하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그때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을까, 이제 와 다시 생각해도 나의 강한 자립심은 부유했던 유년기의 편애 없는 사랑과, 큰 시련이 왔던 청소년기에 어머니가 내게 보여주셨던 강인함 때문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고생했던 아들이 남부럽지 않은 직장인이 되고 결혼해 손자들까지 생기자, 아들이 자랑스러웠던 어머니는 친척이나 지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아들 자랑하는 것이 일상이 되다시피 하셨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민망한 마음에 어머니에게 다시는 남들 앞에서 아들 자랑 그만하시라고 화를 내었다. 그랬던 어머니께서 연로해지시면서 돌아가시기 2년 전쯤에 치매와 파킨슨병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아내가 줄곧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어머니가 병이 드신 후에도 며느리의 말은 잘 들으셨다. 하지만 병이 깊어지고 증세가 심해지면서 말없이 외출하시는 횟수가 많아졌고, 길을 잃으시고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아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겨서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병원에 입원하던 날, 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어머니를 달래고 억지로 떼어놓고 돌아서 나오는데 가슴이 먹먹해지고 호흡마저 가빠졌다. 누구나 그렇듯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들이 어쩔 수 없이 지금도 한 번씩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곤 한다.

남들 앞에서 아들자랑 좀 하면 어때서, 살을 좀 붙여서 자랑 좀 하면 어때서, 그걸 못 참고 어머니에게 화를 냈었던 일, 병원에 찾아가면 어쩌다 정신이 돌아와 집에 가고 싶다고 병실 침대에서 나를 올려다보셨던 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 보지 못했던 일, 앞으로 욕창이 생길 수 있으니 욕창 예방 매트리스를 준비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던 일, 위독하시다는 병원 전화에 급히 달려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셔서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일까지 가슴에 사무친다. 올해로 돌아가신 지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어머니, 오늘따라 당신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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