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신문은 역사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 한 자락은 사람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 한 토막일수도 있고, 시절의 풍경을 묘사하는 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50년 전 대구'에서 보여드렸던 기사들 대부분 역사의 한 토막, 한 자락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이번 회차에도 사람의 삶의 한 토막, 역사의 한 기점을 보여드리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만약 수능이 정상적으로 치러졌다면 지금 고3 수험생들은 잠시 한 숨 돌리면서 수시 전형 준비나 내가 갈 대학이 어디가 될 지를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겁니다. 하필 코로나19 때문에 수능이 늦어지는 바람에 지금 고3 수험생들은 12월 3일에 있을 수능을 위해 마지막 스퍼트를 내는 시간이 되긴 했습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맘때쯤 대입이 절정이었던 시기도 있었으니까요.
1970년 11월 21일자 매일신문 7면을 살펴봅시다. 이날 신문에는 전날 치러진 예비고사 시험장 풍경을 스케치한 기사가 톱 기사로 실렸습니다. 당시에는 '대학입학예비고사', 속칭 '예비고사'라고 불리는 시험을 치러야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기사를 살펴보면 전체 수험생 중 150%를 합격시킨 뒤 그 학생들에게 각 대학 본고사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지금의 수능과는 조금 다른 시스템이기는 합니다.
이날 예비고사는 포근한 날씨 속에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보도하고 있는데요, 경북지구(당시 대구는 광역시가 아니었으므로 경북에 포함됩니다)에서는 1만8천359명이 대구시내 13개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렀네요. 재미있는 건 예비고사를 치기 위해 대구경북 각 지역 수험생들이 대구로 몰려들었다는 사실이 되겠네요.
이날 시험은 요즘 말로 하면 '불수능'의 기조를 보였던 모양입니다. 국어가 까다로웠고 수학도 응용문제가 많이 출제돼 만만치 않았다고 수험생들이 털어놓는군요.
시험장 주변 풍경도 재미있습니다. 요즘은 봉사단체에서 커피나 녹차를 나눠주거나 1,2학년 후배들의 응원 등이 하나의 풍경처럼 보여지는데요, 예전에는 엿장수, 콩국장수, 우동장수들이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네요. 대구동중 고사장 앞에 자리잡은 우동장수는 "하루 300그릇 팔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왔을 정도라고 하니 이 때가 잡상인들의 대목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예비고사는 수능보다 잔인한 측면이 하나 있습니다. 성적 발표일 전까지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요, 기사에 따르면 합격자발표는 12월30일인데 그 때까지 정답발표도 없다고 하네요.
이 때 수험생이었던 분들 중 어떤 분은 수험생 손자를 둔 처지가 됐을 수도 있겠네요. 만약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당시 수험생분들 주변에 수험생 손자가 있거나 수험생이 있다면 한 번 격려해 주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다시 한 번 수험생 여러분들의 좋은 결과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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