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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 전경옥

11월은 ‘만산홍엽 감사의 계절’, 힘겨운 나날 힘 내자!
단풍은 나무에겐 아픔, 자기 희생의 고운 모습

도심 속 두류공원에도 알록달록 단풍이 물들었다. 매일신문DB
도심 속 두류공원에도 알록달록 단풍이 물들었다. 매일신문DB

며칠 전만 해도 그 뭐라는 이름난 단풍 명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눈 돌리는 곳 어디나가 단풍 천지였다. 마법이라도 부린 듯 회색의 도시 곳곳을 빨갛게, 노랗게 물들인 단풍 절경에 모처럼 눈도 마음도 시원했다.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것에는 시샘이 따르는걸까. 봄날 벚꽃이 만개할 때도, 늦가을 만산홍엽을 이룰 때도 꼭 비가 심통을 부린다.

보석같던 단풍들을 훌훌 떨구고 하룻밤새 맨몸뚱이 겨울나무가 돼버렸다. 그래도 둥치엔 추억인듯 단풍 카펫을 깔고 있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인가. 일년 열두달 중 11월을 가장 좋아한다. 꽃 피는 봄도 좋지만 단풍지는 계절에는 그냥 속절없이 마음이 빠져든다.

일찍이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도 시 '산행'(山行)에서 단풍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멀리 차가운 산을 오르니 경사진 돌길/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인다/ 수레를 멈추고 무심히 즐기는 단풍든 숲의 저녁/ 서리맞은 잎은 이월의 꽃보다 붉구나'

지난 주일엔 교회마다 추수감사절을 기렸다. 캐나다는 앞서 10월 두 번째 월요일, 미국은 11월 네 번 째 목요일이 추수감사절이다. 우리네 명절처럼 흩어져 살던 부모·형제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잘 구운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가족간 정을 나눈다.

400년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주한 102명의 청교도들. 악전고투 끝에 도착한 소망의 땅, 추위와 기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극한 상황에서 친절한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고 첫 수확을 거둔후 그들을 초대해 감사의 축제를 연 것이 그 유래이다.

단풍 계절엔 전국 최고 인기 누리는 팔공칸트리클럽. 매일신문DB
단풍 계절엔 전국 최고 인기 누리는 팔공칸트리클럽. 매일신문DB

굳이 추수감사절이 아니어도 11월은 감사의 계절이다. 오곡백과도 그렇지만 단풍의 계절이라는 그것만으로도 칭송받기에 족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올해는 코로나 괴물에 숨막히고, 먹고 사는 일은 나날이 힘겨워지고, 나라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들로 한숨만 나오게 하고…. 이런 세상에 선물처럼 단풍이 찾아와 온 산하를 물들이고, 우리를 숨쉬게끔 해주었다.

단풍은 나무에겐 아픔이기도 하다. 기온이 떨어져 나뭇잎 속 엽록소가 파괴돼 붉고 노란 색깔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고운 잎들도 결국은 기진해서 떨어져 죽는다. 그 과정에서 나무들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고통을 겪는지도 모른다. 위정자들도 지도자 코스프레만 하지 말고 저 단풍처럼 한 번이라도 자기 희생의 고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걸까.

대구 동구 불로동 고분군. 산책하며 사색하기 좋다. 매일신문DB
대구 동구 불로동 고분군. 산책하며 사색하기 좋다. 매일신문DB

대구 불로동 고분군(古墳群)에 갔다. 5~6세기 삼국시대 고분 200여 기(基)가 나지막한 구릉을 따라 펼쳐져 있다. 신라 왕릉의 축소판 같은 무덤들도 있고, 유별나게 작은 무덤도 있다. 음습함과는 거리먼,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1천5백여 년전의 유택들! 저 안의 누군가도 한때는 지금의 우리처럼 웃고, 울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자식낳고 키우느라 땀흘리며 살았으리라.

실크로드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에 묻힌 약 4천년전 무덤발굴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미이라 상태의 여성인데 놀랄만큼 생생했다. 유럽계인 듯 오뚝한 코에 유난히 긴 속눈썹까지…. "와~ 정말 미인인데요!" 발굴대원들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4천년이라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바짝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었다.

망연히 고분들을 바라보노라니 명리(名利)를 다투는 세상사가 달팽이 뿔 위의 싸움처럼 그저 허허롭다. 철학자 최진석은 '금방 죽는다' 라는 글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앉아 '나는 금방 죽는다' 고 서너번 중얼거린다고 했다. 그러면 적어도 그날 하루는 덜 쩨쩨해질 수 있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하게 쓸 수 있고,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래도 사는 것이 이 모양 이 꼴인걸 보면 아직 덜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유머를 던지기도 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에 옷을 벗긴 나목들이 안쓰럽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목생(木生)인 것을! 내년 11월까지 단풍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쉽고 허전하다. 모란이 지고난 뒤,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기던 영랑의 심정도 이러했을까.

일본 에도(江戶) 시대 선승 료칸(良寬)의 하이쿠 '떨어진 벚꽃도, 남아있는 벚꽃도 다 지는 벚꽃'을 본따 읊조려 보고 싶다. '떨어진 단풍도, 남아있는 단풍도 다 지는 단풍'!

전경옥 디지털 논설위원
전경옥 디지털 논설위원

전경옥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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