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명수의 일상중국] ‘천자의 나라 중국 칙사 왕이’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청와대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에 따른 의전계획에 없던 악수라 왕이 외교부장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청와대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에 따른 의전계획에 없던 악수라 왕이 외교부장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 연합뉴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천자'라 불리는 중국 황제가 보내는 서신을 '칙서'라 불렀고 그 칙서를 전달하러 조선에 오는 사신은 '칙사'로서 천자 대하듯 극진하게 모셨다. 조선시대 얘기다. 중국(명·청)이 사신을 통해 황제의 칙서를 보내겠다고 하면, 조선은 국경 '의주'에 영빈사(迎賓使)를 보냈다. 거기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한양까지 수행하면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칙사의 거들먹거림과 위세는 도를 지나쳤다. 조선의 왕은 모화관(지금의 독립문)까지 직접 나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칙사를 맞이하여 궁궐로 동반 입궐했다.

조선시대 칙사 행차에서나 있음 직한 볼썽사나운 풍경이 21세기에 벌어졌다. 중국 외교부장 왕이(王毅) 행차다. 지난 25일 방한해서 27일 오후 중국으로 돌아간 왕 부장의 방한 일정은 그야말로 황제나 칙사의 그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 서열 2위 박병석 국회의장, 문정인 대통령 특보와 윤건영 의원 등 여당 의원 20여 명이 왕이 부장에게 면담 일정을 요청했고, 밥 한 끼 먹는데 '친문' 꼬리표를 단 여당 실세 의원들이 달려들었다. 자가 격리 중인 이낙연 민주당 대표도 '친전' 서한과 꽃다발을 보내 직접 알현하지 못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업무 파트너가 아닌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왕이 부장과의 면담을 추진하다가 불발됐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에 약속 시간이 지나 숙소를 출발해 놓고 '교통 탓'에 늦었다며 왕 부장은 당당했다. 이 시점에 한·중 양국 간에는 뜨거운 현안은 없다. 굳이 있다면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한 차례도 한국에 오지 않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일정과 리커창 총리가 참석하는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 일정 정도다. 3국 정상회의 의장국인 우리 측이 일정을 조율하고 있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일정을 논의할 형편이 아니다.

합의 발표한 시 주석의 연내 방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중국 측이 사과를 해야 할 처지다. 코로나 탓이라고는 하더라도 중국은 여러 차례 시 주석의 연내 방한을 약속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왕 부장은 기자들이 착용한 마스크를 가리키면서 코로나 상황이 안정돼야 방한이 가능할 것이라며 방한 일정이 지체되고 있는 것을 코로나 탓으로 돌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사스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방중(訪中)을 결심했고, 전 세계가 우려하는 가운데서도 중국을 방문했다. 사스 사태 와중에 사스 사태의 한복판이라고 할 베이징에 외국 국가원수로서는 노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간 것이다.

왕 부장이 이번에 일본과 한국을 연이어 방문한 것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미중 관계와 관련한 중국 측 입장을 설명하면서 한일 양국에 우호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방한한 왕이는 미국 측의 입장을 지지하지 말고 중국을 이해해 달라고 읍소하고 당부해야 할 '을'의 처지였다. 일본에서의 왕 부장의 일정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왕 부장에게 매달리고 쩔쩔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왕 부장은 1박 2일의 방일 기간 중 모테기 외무상과 먼저 만난 후 다음 날 스가 신임 총리를 예방, 20분간 면담했을 뿐이다. 일본 정치권이 실무 방문한 그를 칙사 대접할 이유는 없었다. 청와대에 간 왕이는 문 대통령을 1시간 동안 만났다. 왕 부장은 문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팔꿈치를 들이대다가 마지못해 문 대통령의 손을 잡는 결례를 범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노출됐다. 이전에도 문 대통령의 어깨를 툭툭 쳤는데 상습적인 하대 같다.

왕 부장이 우리가 극진하게 대접해야 하는 위상을 갖춘 중국 지도자인가 간단하게 따져보자. 2007~2013년 외교부장을 지낸 양제츠(杨洁篪)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을 겸하면서 중국의 외교 문제를 총괄하고 있다. 정치국 위원(25인)인 그의 중국 내 서열이 20위권이다. 왕 부장은 당 서열상 양 위원보다 한참 떨어진다.

우리가 정권의 실세를 주중대사로 보내고 있는 것과 달리 외교부 국장과 부국장 사이의 실무자를 주한 중국대사로 보내온 것을 감안하면 중국 외교부장이 '칙사급'은 될 수도 있겠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고 하지 않았던가. 문재인 정부의 뜬금없는 사대주의 친중 외교는 국격을 떨어뜨렸다. 설사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혈맹 북한을 제치고 우리나라를 챙길 리는 없다. "한반도의 운명을 남북 양측 손에 쥐여줘야 한다"며 맞장구를 쳐준 칙사의 입에 발린 말에 희희낙락할 때가 아니다.

외교의 기본은 국격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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