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대학에서 현대희곡을 전공했다. 학위 과정에서 필요했기에 다양한 연극 대본들과 희곡 관련 도서들을 구입했고 그중 희귀본들은 계속 소장하고 있다. 연극인 고(故) 이필동 선생님이 생전에 모아 두신 도서들을 보면 필자의 책과 같은 것들이 간혹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감히 '같은'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과연 그 책이 같은 것일까.
선생님의 책꽂이에서 극작연출가 오태석의 희곡집 한 권을 뽑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첫 장을 넘겨보니 '아성(이필동의 아명) 형에게, 오태석'이라는 저자 사인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필자가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해 소장한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여기서 두 책의 차이를 발견한다.
이필동 선생님이 소장하신 책들에는 선생이 생전에 전국의 연극인들과 교류하며 쌓은 그들과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희곡의 아이디어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고 그것이 무대화되어 오를 때 첫 관객이자 비평가가 되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대구에 내려오지 않았을 작품이 대구 극장에 초대돼 지역 관객에게 소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년 전 서울에서 오태석 선생님을 만났을 때, "아성이 없으니 대구와 인연이 없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이필동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후, 아마도 그와 교류한 수많은 전국의 연극인들이 대구와의 인연이 멀어졌을 것이다.
한국 연극사에 큰 획을 그은 연극인과 전국 무대를 오가며 향토 연극의 기반을 닦은 사람의 교류 흔적이 남아 있는 책의 가치를 어떻게 쉽게 매길 수 있을까. 더구나 이필동 선생님의 책에는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후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남편이 그 책들을 모으며 꿈꿨던 예술 세계를 지켜주고 싶었던 부인의 마음도 얹혀 있다.
이미 몇 대를 이어온 물건이나 상인의 손을 거친 유물의 경우, 물질적 가치를 금액으로 매길 수 있다. 반면 예술품을 직접 소장했거나 소장자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은 경우, 그 예술품에는 사람의 이야기와 감정이 얹혀 있어서 쉽게 대할 수가 없다. 작고한 예술인들의 가족과 그 예술인의 유품을 대할 때는 고고학자들이 문화재를 발굴해낼 때 거쳐야 하는 조심스러운 붓질과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 발굴 과정에서 훼손된 문화재를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예술 자료를 소장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면 회복하기 힘들다.
얼마 전 대구시에 기증된 '이상화 증정 죽농 서동균 병풍'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상화 시인이 독립운동을 함께한 포해 김정규에게 선물한 이 병풍은 시인의 부탁으로 글씨를 쓴 죽농 서동균의 이야기까지 더해져 화제를 모았다. 지난 12월 3일 열린 기증 행사장을 찾은 사람들은 원 소장자 김정규 선생의 후손 김종해 씨의 태도에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종해 씨는 "병풍이 처음 제작된 곳이자 상화 시인의 고향인 대구로 갔을 때 의미가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가족의 이야기는 내려놓고,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 병풍을 통해 펼쳐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932년 병풍이 제작된 지 88년, 1974년 원 소장자 김정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46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병풍과 함께한 가족들의 서사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병풍의 글귀를 따라 적으며 해 주신 이야기들이 스며 있다. 병풍 길이의 반도 못 미치던 키가 병풍 끝에 미칠 만큼 자라고, 그의 아들이 그만큼 자라는 세월도 담겨 있다.
병풍을 기증받은 대구시는 병풍 속 인물들의 이야기보다, 이상화라는 인물보다, 아버지의 유품을 기증하는 아들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 기증 행사를 준비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에도 가족 모두가 한국 현대사의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오셨기에, 선대의 유품을 선뜻 대구로 보내 주신 그 뜻을 헤아리고자 했다. 병풍을 운송차에 실어 대구로 떠나보내실 때, 그리고 기증 행사에 참석하시기 위해 대구를 오가실 때 혹시라도 서운함이 남지 않도록 애썼다. 다행히 행사까지 무사히 끝났고 김종해 씨도 흡족한 마음으로 서울행 기차를 타셨다. 이제 그 병풍이 품고 있는 남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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