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스펙터클 전쟁 영화 '800'

중국군 800인의 용맹…'국뽕'이 폭발했다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한때 우리나라에도 국책영화라는 것이 있었다.

국군의 애국혼과 인민군의 비열함이 주된 플롯인 1970년대 전쟁영화들이다. '증언'(1973),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등 정부가 거액의 제작비를 들이고 군인과 군 장비까지 동원해 제작된 스펙터클한 전쟁영화들이다. 국민에게 반공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선전용 오락영화였다.

50년 뒤, 21세기 첨단 IT 시대에 중국 '국뽕영화'를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모름지기 신문의 영화 지면이란 것이 좋은 영화를 소개해 독자들의 교양 있는 문화생활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하지만, 오늘은 중국 '국뽕영화'의 그 적나라한 현장으로 여러분을 모신다.

참고로 '국뽕'이란 국가와 마약인 히로뽕의 합성어로 국가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대놓고 찬양하는 문화콘텐츠를 일컫는 신조어다.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지난 10일 개봉된 2020년 중국영화 '800'(감독 관호). 제목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파르타 전사 300인을 그린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300'을 연상시킨다. 1937년 일본군 2만 명에 대항해 싸운 중국군 800인의 용맹함을 칭송한 전쟁영화다.

1937년 10월 말 중일전쟁 초기 상하이. 일본군에게 거듭된 패배로 퇴각하던 중국혁명군 524연대는 상하이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들의 숫자는 800명. 강력한 화력의 일본군에 맞서 사흘 밤낮 격전을 펼친다. 급기야 일본군은 격전지 건물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남은 400여 명의 병사들이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한다.

'800'은 제작기간 10년에 제작비가 1천200억 원이 투입된 대작이다. 올해 8월 중국에서 개봉해 4천900억 원의 입장수익을 올리며 박스오피스 1위의 대성공을 거뒀다. 2시간 29분의 긴 러닝타임에 화려한 그래픽, 처절한 전투장면 등 만듦새는 나쁘지 않은 영화다.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이 영화는 피아가 맞붙는 여느 전투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바로 관객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전투의 무대는 '사행창고'라고 부르는 일종의 5층 물류창고 건물이다. 쑤저우 강을 사이에 둔 건너편이 바로 공동국제조계지. 이곳은 여전히 환락의 공간이다. 테라스에서 노래를 부르고, 폭죽을 터트리고, 경극을 공연하는 자유지역이다. 네온 불이 번쩍이는 화려함과 죽음에 맞서는 800 용사의 극과 극, 강 하나를 두고 천국과 지옥이 나뉜 전장인 것이다.

'800'의 가장 흥미로운 설정이자 '국뽕 만발'의 장치다. 천국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관전한다. 심지어 일본군과 중국혁명군의 승부를 예측하는 도박까지 한다. 그러나 800인의 사투를 목격하면서 안타까워 하다가 기부금을 걷고, 귀중품을 내놓고, 전화선을 놓기 위해 목숨까지 던진다. 이들의 행동변화는 장엄한 음악과 함께 오글거림의 극치를 보여준다.

거기에 800 용사들의 면면도 신파의 극점까지 치닫는다.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던 병사가 관우처럼 큰 칼을 들고 대항하거나, 냉소적인 병사가 갑자기 애국의 화신이 된다. 강 건너 꼬마의 경례에 부대원이 모두 일어서 답하는, 50년 전 한국 국책영화에나 있을 법한 미장센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배우들의 목소리는 연극처럼 크고 과장되고, 비장함은 우람하며, 대사는 철저히 중화사상과 애국으로 점철된다. 연기와 연출, 설정과 표현 등 모든 영화적 장치가 '국뽕'으로 치닫는 영화다.

중국 국기를 게양하는 장면은 영화의 애국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특히나 비현실적인 신파성으로 치닫는다. 강 건너 한 소녀가 일본 저격병의 총격을 무릅쓰고 청천백일기를 온 몸에 감고 강을 건넌다. 한밤중에도 눈에 잘 띄는 흰 옷을 입었지만, 저격병은 맞추지 못한다. 이 국기는 이튿날 건물 옥상에 게양되고, 전 부대원이 도열해서 경례를 한다. 이때만 일본군의 집중포화는 없다. 곧이어 일본군 비행기가 등장한다. 총격으로 국기가 넘어지자 수십 명이 총에 맞아 죽으면서 국기를 세운다. 주인공의 소총을 맞은 비행기는 퇴각한다.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영화 '800'의 한 장면 스틸컷

이런 만화적 설정을 천연덕스럽게 화면으로 옮겨내는 뻔뻔함은 중국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뜬금없이 경극의 초패왕이 적진을 달리고, 총격이 쏟아지는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백마는 주제의 상징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색해진다.

역사적으로 이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452명. 전투가 시작되기 전 800여 명이라고 한다. 6일 동안의 전투에서 중국 군인의 사상자는 47명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일본군은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서 전투 장면은 나름 볼만하다. 그러나 긴장감을 주는 것은 초반 30분 정도. 영화의 타이틀이 20분 경과 후에 나오니 첫날 전투 이후는 지루한 신파의 연속이다.

'800'은 과대 포장된 중국 '국뽕영화'의 현실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하는 영화다. 돈을 들여 치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영화적 완성도는 유아적인 단계임을 확인하게 한다. 한편으로 이런 수준인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가. 149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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