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저술자 일연 스님은 어릴 때부터 속세를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자 그의 어머니는 아홉 살배기를 전라도 무등산 무량사에 취학시켰다. 가까운 팔공산이면 행여 어미 품으로 불쑥 쫓아올까 우려했을 것이다. 열네 살 때는 다시 설악산 동쪽 자락 양양의 진전사로 보내졌다. 진전 대웅 장로로부터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은 뒤 22세이던 고종 14년(1227) 겨울 개경 광명사에서 치러진 승과에 나아가 장원에 올랐다.
그 뒤 포산의 보당암에 좌선하여 망상을 끊는 데 마음을 두었다. 31세이던 가을 몽고병 침입으로 피신하고자 문수보살에게 아(阿)·라(羅)·바(跛)·사(捨)·나(那) 주문(呪文)을 염송하며 감응을 기다렸는데, 벽 사이에서 홀연히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가 북쪽에 있다'고 계시해 무주암에 거처했다. 32세인 이듬해 여름부터 묘문암에 머물면서 활연(豁然)히 깨달음이 있었다고 했다. 삼중대사를 거쳐 41세에는 묘문암에서 선사가 된다. 44세에 정안이 남해의 집을 희사해 세운 정림사 주지로 초청된다. 관당을 오가며 대장경 판각에 관여시켰을 것이다. 거기서 대선사의 법계도 받는다. 훗날 인홍사(仁弘社, 현 仁興寺址) 주지를 맡아 11년간 머물면서 '역대연표'를 짓는다. 72세 되던 충렬왕 3년에 조서를 받고 청도의 운문사 주지로 있으면서 그 이듬해 간행한 '역대연표'가 지금의 삼국유사 기틀일 것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유가면 용리에 소재한 석굴의 샘을 '보안샘'(보재미샘)으로 기록하고 '까치절터 아래에 있는 우물로 물맛이 매우 좋음'이라고 풀이했다. 또 '까치절터'는 '대견사 아래에 있는 절터'라고 풀어 썼다. 나아가 '보재미샘'을 '보안샘'으로 풀이했다. 유가읍 용리 가재골에선 아직도 이 샘을 보잠샘·보재샘·보재미샘으로 부른다. 모두 보당암에서 파생된 보당암의 샘이다. 일연 스님과 같은 고을인 원효대사의 내향이 불지촌인데, 훈차어로 발지·불등을촌이라는 것과 같다. 지금 석굴 샘엔 물바가지가 놓여 있다. 필자가 오래전에 찾아낸 대견봉(1,036m)의 보당암 샘터는 해발 900m쯤의 석굴에 있고, 보당암 추정 절터는 대견봉과 석굴 사이 해발 960m쯤에 있다.
시민단체가 비슬산참꽃케이블카 설치가 경관과 생태계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지적을 제기해 언론에 보도됐다. 사실 대견봉 일대의 암석과 벼랑 및 뾰족한 봉우리는 우수한 경관 자원이다. 조감도를 보면 휴양림 주차장에서 대견봉 사이에는 케이블을 연결할 기둥이 총총 보인다. 이런 기둥은 어떻게 설치하며 정상부 케이블카 주차장 마련과 더불어 중장비는 어디로 진출할까. 대견봉 일대의 절터와 보재미샘 석굴 및 정상부 능선의 등산로도 우려된다.
일연 스님이 태어난 고려시대 장산군은 지금의 경산시 자인면이다. 경산시는 원효대사와 그 아들 설총 및 일연을 삼성현이라 일컬어 삼성현문화박물관을 건립하고 매년 삼국유사를 비롯한 학술대회를 갖는다. 군위군은 경상북도와 함께 삼국유사 조선 초기본 목판 판각을 완료하는 등 이미 삼국유사 고장으로 굳혔다. 기온에 민감한 진달래는 참꽃축제 때마다 개화가 불안하고 절터도 인위적인 손상을 우려한다. 비슬산참꽃케이블카 설치 논란이 이는 이참에 대견봉 일대의 절터를 발굴 조사하면 좋겠다. 절터에 이미 만든 힐링 쉼터의 시설물을 철거하고 석탑은 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포산의 삼국유사 문화유산 보존 대책이 요구된다.
권영시 '보각국사비명 따라 일연一然의 생애를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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