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코로나19와 체스판의 밀알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긴급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 참석하며 정세균 국무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긴급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 참석하며 정세균 국무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해용 논설실장
김해용 논설실장

한 남자가 자신이 발명한 체스판을 들고 왕을 알현했다. 체스 게임에 매료된 왕이 상을 내리겠다고 하자 남자는 밀을 달라고 했다. 체스판의 첫 칸에 한 톨, 둘째 칸에 두 톨, 셋째 칸에 네 톨을 주는 식으로 앞 칸의 두 배씩 양을 늘려 달라는 조건이었다. 남자의 요구가 너무 소박하다고 생각한 왕은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심각한 오판이었다. 체스판의 총 64칸 중 32칸을 채우자 남자에게 왕이 줘야 할 밀은 큰 밭에서 소출되는 양으로도 부족했다. 이대로라면 64칸을 다 채우기도 전에 나라 살림이 거덜 날 판이었다.

왕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여기에는 두 개의 열린 결말이 있다. 하나는 '남자에게 왕실의 전 재산을 빼앗긴다'이다. 다른 하나는 '왕이 약속을 깨고 남자를 죽여버린다'이다. 지구적으로 창궐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를 보니 체스판의 밀알 이야기가 떠오른다. 왕이 판단 착오로 밀알 보상 증가세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처럼 코로나19도 대응이 늦어질수록 막기가 힘들어진다. 애초에 지난해 말 중국 정부가 초기에 제대로 대응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지구적 재앙으로까지는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코로나19는 100년 전 지구촌을 강타한 스페인독감과 많이 닮았다. 다른 유행병에 비해 치명률은 낮지만 막강한 전파력을 무기로 두 바이러스는 인류의 방역망과 사회적 관계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인류가 학교·교회 폐쇄, 다중집회 금지, 마스크 착용 의무화, 감염자 격리, 소독 등 대응을 한 것도 유사하다. 스페인독감은 세계 인구의 27%를 감염시켰고 세계 인구의 3~6%(5천만~1억 명 추산)나 되는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의료 수준이 떨어졌고 시민들의 무지가 겹쳤던 탓이다. 코로나19는 중국 우한에서 집단 전파가 시작된 이래 1년여가 지난 지금 전 세계에 7천200여만 명의 확진자와 163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통계만 보면 인류가 선방하는 것 같지만 상황이 암울하기는 매한가지다. 스페인독감은 집단면역 효과로 2년여 만에 종식됐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집단면역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선방을 한 것으로 인식돼 왔는데 요즘 들어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국내 확진자 발생 곡선 기울기가 무서울 정도로 가파르다. 경제와 방역 두 토끼를 잡겠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정부가 중요 고비 때마다 사회적 거리두기 상향 조치에서 한 박자 늦게 대처를 한 점이 너무도 뼈아프게 다가온다.

사실, 정부가 마냥 사회적 거리두기에 기대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확산세를 통제 범위 안에 두는 보조적 수단일 뿐이며 장기화될수록 성공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우리가 자부심을 갖던 'K방역' 성공 뒤에는 국민들의 협조가 있었다. 우리 국민들은 방역과 인권이 충돌할 경우 방역이 우선이라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 확진보다 확진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 자체가 더 큰 공포인 사회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는 세계에서 몇 안 된다.

하지만 어떤 사회에도 말 지독하게 안 듣는 집단과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방역은 이런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부의 코로나19 브리핑을 찬찬히 뜯어보면 성공할 경우 '정부 덕', 실패하면 '국민 탓'이라는 유체이탈식 화법이 은연중에 읽힌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코로나19를 이길 수 없다. 이미 국민 협조와 희생에만 기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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