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기업 맞나?' 건물주 울린 세입자 아모레퍼시픽의 기발한 '을질'

에스쁘아가 입점했던 현장.
에스쁘아가 입점했던 현장.

아모레퍼시픽 브랜드 '에스쁘아'가 계약 관련 분쟁이 발생하자 매장 공간을 임차하며 받아낸 전세권으로 건물주에게 소송 압박을 가하는 등 '을질' 논란에 휘말렸다. 계약 종료 뒤엔 원상 복구조차 하지 않은 채 퇴거해 뒷말이 나오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지하 1층 지상 5층짜리 건물을 관리하는 최모 씨(42)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에스쁘아 쪽에서 "계약 기간이 곧 끝난다. 보증금을 돌려 달라"며 "이행되지 않을 경우 전세권이 설정돼 있으니 보증금 반환 소송이 진행될 것"이란 내용증명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최 씨는 2017년 11월쯤 이 건물 지하 1층~2층을 2018년 1월 1일부터 3년간 임차하는 월세 임대차 계약을 에스쁘아와 맺은 바 있었다.

월세 계약이었지만 에스쁘아 담당자였던 A 차장은 계약 당시 내규를 들며 전세권 설정을 요구했다. 계약상 임차권 설정이 맞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최 씨에게 A 차장은 "모든 계약은 전세권 설정을 하게 돼 있다. 계약 종료시 우리가 책임지고 전세권을 해지할 테니 믿고 진행하면 된다"고 했다. 최 씨는 찜찜했지만 "대기업이니 약속을 지키겠지"란 생각에 이를 용인해줬다.

정상적인 계약이면 임대차 기간 종료 뒤 최 씨가 보증금을 돌려주면 끝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현재 구두 계약 이행 관련 분쟁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쁘아가 설정한 전세권은 최 씨를 압박하는 부메랑이 돼 버렸다. 법상 임차권은 채권이라 부동산 경매를 신청할 수 없지만 전세권은 물권이기에 임차인이 전세금을 못 돌려 받으면 부동산을 바로 경매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야 최 씨는 아모레퍼시픽이 왜 월세 계약에 전세권을 설정해 달라고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에스쁘아는 원상복구를 사실상 하지 않고 떠났다. 건물 외부의 입구 나무 장식은 그대로였고 2층 창고의 나무 바닥은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에스쁘아는 원상복구를 사실상 하지 않고 떠났다. 건물 외부의 입구 나무 장식은 그대로였고 2층 창고의 나무 바닥은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분쟁의 조짐이 보였던 건 계약 전부터였다. 아모레퍼시픽은 보증금 40%와 월세 17% 인하를 요구하며 "보증금 3억 원, 월세 2천 750만 원에 해 달라. 대신 우리가 임차하면 5억 원을 들여 건물을 리모델링 해주겠다. 5년 계약에 3년 차부터 월 100만원씩 임차료를 인상해주겠다"는 안을 제시했다. 리모델링에 관심이 있었던 최 씨는 아모레퍼시픽과 4개월간의 협상을 통해 2017년 11월 최종 협의를 마쳤다.

문제는 계약 당일 발생했다. 계약 당일 A 차장은 최 씨에게 5년 계약서가 아닌 3년 계약서를 내밀었다. 3년 차부터 100만 원씩 인상되는 월 임차료 조항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A 차장은 "임차료 부분은 3년이 지난 뒤 재계약 시 인상해 주겠다"고 했다. 세부 사항 조율에 이미 4개월 가까이 임차 공간을 비워놨던 최 씨는 어쩔수 없이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계약 이후 리모델링 공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최 씨가 이에 대해 묻자 A 차장은 "빠르게 매장을 열어야 하기에 약속했던 공사를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구두 계약 이행을 요구하던 최 씨는 A 차장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책임자를 연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다 임차료 지급 관련 문제가 터지자 그제야 책임자인 B모 팀장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B 팀장은 최 씨에게 "이 일로 담당자가 업무에서 배제됐다. 앞으로 나와 연락하면 된다"고 했다. 최 씨는 "구두 계약 된 부분 역시 이행해 달라"고 요청했고 B 팀장은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구두 계약 사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얼마 뒤 B 팀장이 퇴사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졌다.

계약이 끝나가는 지난해 11월 초쯤 A 차장이 돌아왔다. 그는 "우리는 계약 기간 끝나면 나가겠다. 다만 공사비를 대납해 줄 테니 외벽 리모델링 공사를 당신이 진행하라"고 했다. 계약서 작성 당시 공사 기간을 감안해 2개월 가까이 임차료 면제를 해준 최 씨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공사 기간으로 소요될 몇 개월의 기간 동안 임차료는 내지 않고 나가겠다는 에스쁘아의 꼼수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최 씨가 이를 거절하자 A 차장은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후일을 기약했다. 하지만 며칠 뒤 최 씨가 받아 든 건 전세권을 쥐고 자신이 관리하는 건물을 경매로 처분하겠다는 취지의 법적 대응 예고 내용증명이었다.

최 씨는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4개월과 임차료 면제 3개월, 보증금 할인, 임차료 할인, 전세권 설정 등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줬다. 하지만 돌아온 건 전세권을 앞세운 법적 대응 예고 내용증명이었다"며 "대기업이 어떻게 이런식의 행태를 보일 수 있냐"고 했다.

최 씨가 아모레퍼시픽 에스쁘아와 맺은 계약서 일부. 건물 외벽을 리모델링 하겠다는 의미의
최 씨가 아모레퍼시픽 에스쁘아와 맺은 계약서 일부. 건물 외벽을 리모델링 하겠다는 의미의 '시설' 조항이 포함돼 있다. 또한 전세권 말소와 임대보증금 반환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조항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임차인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려고 그룹 전체가 임대차 계약 시 전세권 설정을 하고 있다"며 "건물 관리인이 주장하는 구두 계약 사항은 협의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일 뿐 최종 협의 사항은 계약서 내용이 전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계약서에는 "외벽은 전부 임차인이 시설해 사용한다"는 공사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한편 최 씨는 자신이 관리하는 건물이 경매로 넘어갈까 두려워 전세권이 해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날짜에 맞춰 보증금 전액을 아모레퍼시픽에게 보냈다. 계약상 전세권 해지와 보증금 반환은 동시에 이뤄져야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변기가 사라진 화장실 공간. 폐기물만 남겨져 있었다.
변기가 사라진 화장실 공간. 폐기물만 남겨져 있었다.

최 씨는 "원상 복구조차 되지 않고 연락도 안 된다. 너무 억울하다"며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넣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기자가 방문한 현장은 공사판과 비슷했다. 지하 1층의 화장실 변기는 아예 사라져 있었고 폐기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바닥과 벽 곳곳엔 파손된 흔적으로 가득했다. 외부 주차장도 주저 앉은 채로 방치됐다.

곳곳에 파손된 흔적.
곳곳에 파손된 흔적.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원상 복구가 미진했던 것 같다. 향후 원만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