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정치'가 '동네 주민'들의 신뢰를 상실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제 이야기다.
출발은 희망찼다. 1961년부터 이어진 30년의 군사독재 기간 사실상 폐지됐던 지방자치법은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1991년에는 두 차례 선거를 통해 광역·기초의원을 선출했다. 드디어 '지방자치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30년이 흐른 지금, 우리 눈에 비친 지방자치의 현주소는 아직 초라하다. 이립(而立·30세를 달리 이르는 말로,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의미)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기초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매일신문은 2021년 새해를 맞아 '서른 살 지방자치제'가 보여준 민낯과 준비해야 할 미래를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30년 이어진 '불신의 역사'
'준비 없이 地自制(지자제) 출범…엉성한 選擧(선거)', '후보자끼리 뒷거래, 그릇된 風土(풍토) 창출'. 첫 지방선거가 열렸던 1991년 당시 매일신문이 뽑은 제목들이다.
이처럼 지방자치제에 대한 주민들의 무관심과 불신은 그 뿌리가 깊다. 불씨는 1991년 첫 지방선거부터 지펴졌다. 30년이 흐른 지금까지 문제점으로 꼽히는 선거 혼탁과 주민 무관심, 부정부패 등 갖가지 문제들이 첫 선거부터 불거져 나왔다.
첫 지방선거를 맞은 1991년 대구경북의 풍경을 당시 매일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봤다.
전국 단위의 총선·대선보다 관심도가 떨어지는 현상은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첫 지방의원 선거가 치러진 1991년 3월 26일 15면 '투표 무관심… 행락 붐벼' 제하 기사에는 이런 모습이 생생히 기록됐다.
당시 대구의 투표율은 오전 9시까지 8~9% 수준으로 직전 총선·대선 평균인 15%대에 크게 못 미쳤다. 때문에 관계기관에서 투표율을 높이고자 안간힘을 쏟은 흔적이 기사에 남았다.
"각 구청은 담당 동마다 전화를 걸어 '직원과 통장이 2인 1조로 동네 골목골목을 돌며 투표참여 권유방송을 계속하라'고 닥달하는 등 투표율 올리기에 초비상."
지방선거 때마다 이슈가 되는 부정부패 문제도 첫 선거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같은 26일 자 '후보 담합 구속 무투표 당선자 사퇴' 기사에는 경북 구미 한 지방의원 후보자가 무투표 당선을 위해 담합을 벌였다가 구속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결국 해당 후보자마저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후보자가 모두 사라진 구미는 지방선거 당일에 전국 최초로 재선거를 확정하는 촌극을 벌였다.



이에 27일 자 신문은 대구의 첫 지방선거를 '저조한 후보등록, 무투표 당선율 최고, 투표율 50% 이하'로 규정하며 "저조한 투표율은 무투표구 양산에 수돗물 파동(페놀 사태), 정치 불신, 홍보부족 등 복합적 원인"이라는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다.
매일신문은 광역의회 선거가 치러진 같은 해 6월 20일 자에 아예 '불법·타락·인신공격… 풀뿌리가 풀뽑기 민주주의 전락'이라는 제목으로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기사는 "금전살포, 조직폭력배 동원, 흑색선전과 유언비어 등이 이번 선거에서 활용돼 유권자들을 실망시켰다"고 비판했다.
이 기사에는 박노익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이 기자 시절 수성구 상동 모처에서 후보자의 위법 현장을 취재하다가 운동원들에게 폭행을 당한 일도 기록됐다.
박 전 부장은 "주민들에게 선물이나 음식을 돌린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에 갔다가 증거를 은폐하려는 운동원들에게 카메라와 필름을 빼앗겼다"며 "그때는 지방선거만 하면 돈 선거가 적발됐다. '못 얻어먹는 사람이 바보'라고 했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대구경북은 첫 선거부터 특정 정당의 의회 독점으로 인한 지방정부 견제기능 상실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91년 3월 27일 자 1면 '비판세력 없는 시·도·구의회' 기사는 "대구경북 당선자들의 소속을 보면 전체 586명 중 민자당 출신이 379명, 친여 인사가 173명으로 전체의 94%가 여권 인사"라며 "국회의원의 민자당 독식에 이어 기초의회마저 친여 일색이 돼 주민들 사이에서는 '말만 지방자치이지 자문기구 역할밖에 못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썼다.

◆다르지 않았던 '7번째 지방자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지방자치제는 이후 30년이나 비슷한 문제를 계속 겪었다.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범한 민선 7기 지방정부·의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 18일에는 하루에만 3명의 경북 현역 단체장이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날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김영만 군위군수는 법정 구속됐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전찬걸 울진군수는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다. 관급공사 이권 개입 혐의를 받는 엄태항 봉화군수는 이날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지방의회 의원들의 일탈도 끊이지 않았다.
경북 예천군의회는 취임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은 2018년 12월 미국과 캐나다로 해외연수를 떠나 가이드를 폭행하고 여성 접대부 술집 알선을 요구한 사실이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경산시의회는 의장 선거 과정에서 의원들이 볼썽사나운 감정 다툼을 벌이며 금품 제공과 부정선거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다.
대구에서는 이재만 전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의 불법 선거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지방의원 6명이 무더기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아 재보궐선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결국 30년을 반복돼온 이런 문제들이 지방자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낳았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지방선거 때마다 나오는 '지방자치 무용론'은 결코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지방자치 자체 폄하 안 돼"
그러나 정치권 인사들과 전문가들은 "지방자치 자체를 폄하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섣부른 무용론 제기보다는 성과에 주목하고, 문제점들을 보완해나갈 방법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일탈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방자치의 성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세헌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지방이 중앙정부의 지시만 받던 입장에서 주체적 결정을 내리는 입장으로 바뀌었고, 주민들이 지방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넓어졌다. 특히 '관존민비' 현상으로 대표되던 행정의 높은 문턱도 선출직으로 바뀌면서 '행정 서비스'로 바뀌는 등 선순환도 일어났다"고 강조했다.
주민들의 정치 참여가 현재 수준까지 늘어난 데 대한 유무형의 영향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강우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방의원과 자치단체장을 뽑고, 잘못했을 경우에는 주민 소환을 하는 등 국민 주권 실현에 대한 고민이 가능해진 것도 결국 지방자치 30년간 다양한 차원에서 주민자치가 이뤄져 왔기 때문"이라며 "주민참여예산 등 지방자치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주민자치가 여러 형태로 실현되고 있다. 성과들이 일상 깊은 곳까지 이미 들어와 있어 인지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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