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7년에 이상한 전염병에 걸렸던 선원들을 태운 상선 하나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메시나항에 정박했다. 고열과 구토 등의 증상에 시달리던 선원들은 얼마되지 않아 모두 사망했다. 나중에 페스트로 밝혀진 이 전염병은 다음 해에 제노바,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했고 이후 프랑스, 스페인, 잉글랜드, 독일,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 폴란드, 러시아 등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페스트는 1353년까지 6년 동안 유럽에서 맹위를 떨쳤고 7천500만 명~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상 최악의 전염병으로 기록됐다.
당시 이탈리아 시에나의 아뇰로 디 투라 라는 사람은 페스트의 참혹함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매일 밤낮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 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라고 적었다. '흑사병'이라고도 불리는 페스트는 유대인, 집시 등을 희생양으로 삼아 이들에 대한 집단 폭력과 학살 등의 비극을 빚었고 인구 감소로 당시 장원 경제와 봉건제도의 사회적 기반이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 뿐만 아니라 중동,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에서도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1918년에 발생해 2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2천500만 명~5천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스페인 독감도 인류에 치명타를 안긴 전염병이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간 이어진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수보다 세 배나 많은 피해 규모를 기록했고 미국에서 총 50만 명, 영국에서 1919년 봄에만 15만 여명이 숨졌다. 당시 조선에서도 '무오년 독감(戊午年 毒感)'이라고 불리며 740만여 명이 감염됐고 이 중 14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초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쓸며 많은 인명들을 앗아간 2020년 역시 역사적인 '재앙의 해'로 남게 됐다.국제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한국시간 31일 오전 10시 기준으로 세계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8천302만9천여 명, 사망자는 181만1천여명으로 집계됐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어 누적 확진자가 세계 전체의 24.3%인 2천20만1천여 명, 사망자가 19.3%인 35만400여 명이나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감염자와 사망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20년은 아마도 전 세계인들에게 지금까지, 혹은 나중의 삶에서도 특별히 환난이 닥친 때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은 저마다, 혹은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한 시기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고나 아픔을 겪었던 때가 있을 것이고 특정 지역의 주민이나 특정 국가의 국민들이 위기에 휩싸였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2011년 대지진과 쓰나미를 겪었던 일본 동부의 후쿠시마 사람들,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었던 우리나라 국민, 오랜 내전과 테러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예멘, 이라크 국민 등이 그러할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러한 국지적인 전쟁이나 재난을 넘어 지구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하면서 2020년을 오래도록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 페이지로 장식할 것이다.

1997년에 외환 위기가 닥쳤을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를 강타한 충격에 휘청이면서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쳤다. 일부 사람들은 '왜 하필 내가 살고 있는 이번 생에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기지?'하며 운명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코로나19의 출현에 대해서도 원망 비슷한 감정이 생길 수 있겠다. 그러나 나만 이 위기를 겪는 것이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과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나누는 동병상련의 연대감도 싹튼다.
한편으로, 이처럼 전세계적인 재난 상황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별한 위기 극복의 DNA를 지녔다는 생각도 해 본다. 우리나라는 20세기 이후에 일제 치하의 암흑기와 한국 전쟁의 참화를 겪었고 1960년대의 빈궁기를 거쳐 비약적인 경제 성장으로 선진국 대열에 오르는 대반전의 역사를 이뤄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선 압축성장의 신화이다. 경제 성장의 과정에 오일 쇼크, 외환 위기, 금융 위기 등의 큰 고비가 있었지만 다시 상승 성장 곡선을 그려냈다.
이렇듯 독특한 성장의 역사는 세대별로 서로 너무나 다른 경험을 지니게 했다. 일제 치하와 한국 전쟁을 겪어야 했던 1930년대와 1940년대생, 끼니를 제때 못 먹을 정도로 세계 최빈곤층의 삶을 경험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생, 성장 궤도에 진입했던 시기의 1970년대와 1980년대생, 풍요로운 사회에서 삶을 시작했지만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 질 수 있다는 걱정 속에 사는 1990년대생 이후 청춘 등. 연령별 세대가 이처럼 공유할 수 없는 경험을 지니면서 한 사회의 구성원을 이루는 경우도 다른 국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대 간 의식 차와 갈등이 심하기도 하지만, 각 세대마다 위기를 극복한 경험을 한데 어우러내며 우리 사회의 발전을 함께 이끌어냈던 게 아닐까.
팬데믹이 불러온 2020년의 세밑은 참으로 낯설고 쓸쓸하다. 젊은이의 거리는 적막하고 송구영신의 들뜬 분위기도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여 제야의 종을 치고 새해 해돋이를 보지도 못한다. 코로나19차 유행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데다 변이 바이러스까지 생겨나 불안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늦어지는 백신 도입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새해인 2021년에도 이 성가신 전염병을 언제쯤 종식시킬 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한 공포가 가슴을 짓누른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선방하고 있고 위기 극복에 온 힘을 쏟고 있으니 새벽의 여명처럼 찾아올 희망을 품어야 한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재앙이지만, 과거에도 어려움을 이겨냈듯이 오로지 한길로 지혜롭게 연대해 '어둠의 강'을 건너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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