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14번째 이야기. 안동소주 그리고 제비원
한국인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은 단연 소주다. 통계를 보면 지난 해 우리 국민 1인당 약 80병 정도를 마셨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안한다면 주당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소주를 마신 셈이다.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술로 등극한 소주는 유감스럽게도 우리 고유의 전통소주가 아닌 주정에 물을 타고 감미료를 첨가한 '희석식 소주'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을 꼽으라면 소주 대신 막걸리를 꼽기도 한다. 그래서 한 때 막걸리 열풍이 불기도 했지만 막걸리가 한국을 대표하기에는 뭔가 2% 정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정쩡한 소주는 어쩌다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술이 되었나?
안동소주의 유래
안동에서는 우리 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소주와 막걸리에 한 가지가 추가된다. '안동소주'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까지 석권했던 소주가 제비원표 안동소주였다.
안동소주가 부활했다. 10여 종류의 안동소주가 출시됐다. 안동소주 전성시대가 다시 전개되고 있다. 안동소주를 주조하는 '대한민국 명인'이 두 분이나 있고 다양한 안동소주를 내놓는 회사가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안동소주 춘추전국시대라 할만하다.

지역마다 특산 술이 있다면 안동에서는 '소주'가 유명했다. 집집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에 따라 '가양주'를 만들었다. 가양주는 막걸리 예닐곱 병을 증류해야 소주 한 병 정도 나올 정도로 귀했다. 그러니 웬만한 일반 민가에서는 소주내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일 년 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고 손님치레를 해야 하는 종갓집이나 권문세가에서는 늘 소주를 내려야 했다. 소주는 그 집안의 정신이자 혼과 다를 바 없었다.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의성 김씨, 진성 이씨 등 안동을 기반으로 살아 온 수많은 반가(班家)에서 술을 빚었다.
안동사람들에게 술은 안동소주였다.
안동소주는 차례나 손님접대는 물론이고 45도에 이르는 독한 도수로 인해 상처를 치료하는 등의 응급처지 상비약으로도 쓰임새가 다양했다. 반가에서 맛볼 수 있는 안동소주 대중화를 이끈 것은 1920년 설립한 '제비원표' 안동소주였다. 일제강점기인 이때 조선총독부는 '주세령'을 내려 가정에서 술을 빚지 못하도록 했고 칼을 찬 순사들이 밀주단속에 나섰다. 양조장에만 주조허가를 줘서 주세를 챙겼다.
그러자 당시 안동 최고의 부자 권태연이 안동소주공장을 차렸다. '제비원표' 안동소주는 불티나게 팔렸다. 제비원 상표에는 안동사람들에게 친숙한 제비원 석불을 그려 넣었고 '안동특산'이라는 문구도 넣었다. 안동소주가 유명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주'가 아니라 '안동소주'가 브랜드로 먹혀들었다. 당연히 제비원 안동소주는 가양주 방식을 발전시킨 증류식 소주였다. 독했다.
만주로도 팔려나가면서 중국대륙에서도 이름을 떨친 안동소주였다. 아마도 안동에서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난 안동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지방마다 소주회사들이 난립했지만 이 제비원 안동소주만큼 명성을 떨친 소주회사는 드물었다.

해방이후 소주는 새로운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일제시대 주세령을 이어받아 가양주를 밀주(密酒)라며 단속을 이어갔다. 급기야 아예 쌀을 재료로는 술을 빚지 못하도록 금지하면서 증류식 소주는 자취를 감췄다. 식량이 부족했던 가난한 '보릿고개' 시대였다. 소주회사는 타피오카와 당밀로 만든 주정을 수입해서 물을 부어 희석하고 감미료를 첨가하는 방식의 저렴한 희석식 소주를 내놓았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요즘의 희석식 소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제비원 안동소주도 증류식 소주 대신 25도짜리 희석식 소주를 내놓고 생존을 모색했다. 안동 오일장 다녀오신 애주가 아버지의 한 손에는 어김없이 제비원 소주 힌병이 새끼줄에 매달려 있곤 했던 기억이 난다. 정부는 '1도 1소주회사' 방침을 앞세워 소주회사 통폐합을 추진했다. 소주회사가 난립하면서 주세(酒稅)가 누락되는 일이 잦자, 세원관리를 투명하게 하기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제비원소주는 대구의 금복주에 강제 통합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안동소주의 명맥도 끊겼다.
안동소주가 부활하게 된 계기는 88올림픽이었다.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행사를 치르게 된 정부로서는 우리 술을 외국인들에게 내놓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통주 발굴에 나섰다. 희석식 소주나 막걸리를 대표적인 한국의 술이라고 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때 안동소주는 이강주 문배술 등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로 각광을 받았 고 안동소주를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한 조옥화씨는 198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조옥화 안동소주는 가정집에서 소주고리에 걸어 중탕으로 내리는 바람에 생산량이 극소량이어서 초기에는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안동소주 부활의 일등공신 조씨는 지난해 작고하셨고, 민속주 안동소주는 '명인'을 이어받은 조 씨의 아들 김연박 대표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민속주 안동소주는 전통적인 가양주 방식의 안동소주제조방식인 밀누룩을 떠서 사용하고 중탕을 해서 소주를 내리는 '상압식' 증류방식을 고수하면서 45도짜리 소주 한 종류만 생산하고 있다. 대단한 고집이다. 예전방식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는 소신이 묻어난다.
안동시 수상동에 자리잡은 민속주 안동소주 공장 한 켠에는 안동소주박물관이 있다. 누구나 신청하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내에는 안동소주 주조과정은 물론 엘리자베스 영국여왕 방한 당시의 상차림도 전시돼있어 볼 수 있고 시음을 하고 직접 구매할 수도 있다.

명인 안동소주
조옥화 명인의 민속주 안동소주는 누룩향이 강했다. 그래서 안동소주에 대한 오호는 엇갈렸다.
우리시대의 달라진 입맛을 반영해서 안동소주의 변화를 모색하는 안동소주가 있다. 민속주 안동소주와 더불어 안동소주의 명맥을 복원시킨 박재서 명인의 '명인안동소주'다. 기존의 45도는 물론, 35도, 22도, 19도 등 다양한 도수의 안동소주를 내놓으면서 주당들의 선택 폭을 넓혔다.
안동 와룡의 큰 부자인 반남 박씨 집안의 가양주는 근동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소주였다. 박재서 명인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소주 내리는 법을 사사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3단 사입' 방식의 소주 증류법에 제비원 소주 공장에서 일한 장동섭 명장의 대량주조기법을 접목, 안동소주공장을 만들어 1992년부터 본격적인 안동소주 생산에 나섰다.
박재서 명인이 고집하는 3단사입방식은 간단히 말하면 누룩을 발효시켜 만든 막걸리를 중탕해서 높은 도수의 소주를 증류하는 기본적인 '감압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주조법이다. 처음에 막걸리를 발효하는 과정은 같다. 발효가 시작되면 같은 재료를 6배 더 넣어 추가 발효를 시키고, 다시 2배의 재료를 더 넣어 재발효를 시킨다. 이렇게 하면 밑술 도수가 21도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이 밑술을 걸러내면 청주가 나오게 된다. 이 청주를 소주고리에 넣어 끓여 증류를 하면 순도높은 소주가 나온다.
3단사입방식과 감압식 증류방식이 '상압식'의 민속주 안동소주와는 다른 깔끔하고 맑은 안동소주 맛을 내도록 하는 비법이다. 상압식은 밑술을 78도까지 끓여 증류를 한다면, 감압식은 섭씨 45도 내외에서 증류가 일어나도록 한다. 또한 전통 밀누룩은 향이 센 편이어서 쌀누룩을 70% 섞어 깔끔한 맛을 추구한다.

명인 안동소주는 수년 전 '안동소주 대란'사태를 불러 온 적이 있다. DVD프라임이라는 한 사이트에서 한 회원이 희석식 소주가 아닌 안동소주를 마셨는데 맛과 향이 살아있다며 안동소주를 추천하는 글을 게시판에 올리자, 다른 회원들이 주문하기 시작하면서 해당제품에 대한 폭풍주문이 몰려 급기야 품절사태를 빚었다. 온라인 주문으로 사지 못하자 안동소주 공장까지 방문해서 사재기하는 일도 벌어졌다.
농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돼서 이 프로그램을 통하면 양조장을 방문해서 술 빚는 전 과정을 볼 수 있다. 양조장 지하에는 부친을 이어받아 경영에 나선 박찬관 대표가 전국을 다니며 수집한 옛날 소주병 등 소주관련 기록들을 모아 전시한 소주박물관이 마련돼 있다.

안동소주는 명인 안동소주와 민속주 안동소주 외에도 120년 양조장 '회곡 양조장'에서 빚어내는 '회곡 안동소주' 를 비롯, 로얄 안동소주, 명품 안동소 주, 맹개술도가의 진맥소주, 버버리찰 떡의 올소, 간재 종택의 종가 안동소주 등 다양한 종류의 안동소주가 있다.
소주는 막걸리를 발효시켜 나온 맑은 술, 청주를 증류해서 나오는 증류주다. 안동소주는 그래서 수수와 고량 등으 로 빚는 중국의 바이주(白酒) 등의 증 류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우리 조상 들도 쌀 뿐 아니라 좁쌀과 수수 등 다 양한 잡곡으로 술을 빚었다. 제주도에 서는 이 차조로 빚은 떡을 오메기떡이 라고 했고 이 떡에 누룩을 넣어 발효 시키면 '오메기술'이 됐다. 오메기술을 증류시키면 '고소리술'이 된다. 고소리
술 역시 안동소주와 마찬가지의 증류소주다.
제주도 술 이야기를 꺼낸 건 안동과 제주, 개성이 예로부터 소주가 유명한 곳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한반도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증류주를 마셨다고 하지만 그 제조법이 본격화된 것은 몽골의 고려침공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다소 설득력이 있다. 몽골이 고려를 점령해서 일본을 침공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안동과 제주 등에 주둔하면서 몽골식 소주증류법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 에 소주 주조법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소주는 안동의 양반가에서 보편적으로 주조해 마시던 가양주였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제비원을 가다
제비원 소주, 제비원 기름, 제비원 삼겹 등 안동에서는 제비원이라는 상호를 쓰는 가게가 눈에 많이 띈다.
그만큼 제비원은 안동사람에게 친숙한 곳이다. 제비원표 안동소주 상표에 미륵불을 그려넣듯이 제비원하면 큰 바위에 오롯이 새겨진 마애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지금은 한적하고 외진 뒷길처럼 여겨지지만 제비원은 경상도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혹은 한양(서울)에 가려면 안동을 거쳐 문경새재와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원(院)은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을 가는 관리들이 숙식을 하고 말을 빌리는 객사였다. 안동에만 제비원 같은 원이 19개가 있었다. 이태원, 조치원, 사리원 등도 다 사통팔달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원'이 있었기에 붙은 지명이다.
제비원에는 몇 가지의 전설이 전해진다. 제비원이라는 지명과 미륵불과 관련한 것이으로 '성주풀이'의 본향이라는 사실까지 다양하다.
이 제비원에는 일찍 부모를 여읜 '연이'라는 소녀가 잔심부름을 하며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소녀는 얼굴과 마음씨가 고와서 이웃 총각들이 사모하였다. 이웃마을에 부자인 김씨 총각도 연이를 사모했다. 그러다 비명횡사해서 저승에 가자 염라대왕은 총각이 살아 생전 악행을 많이 쌓았으므로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이지만, 이웃의 연이에게는 선행의 창고가 가득 쌓여 있으니 연이의 재물을 빌려 인정을 베풀도록 하라고 했다. 총각은 염라대왕의 말을 따라 연이의 선행을 빌어 이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 씨 총각이 전 재산을 기부하자, 연이는 그 재물로 큰 법당을 지었다.
법당을 짓던 목수(대목)가 마지막 기와를 덮고서는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 이 절이 연비사(燕飛寺)가 됐다가 연미사가 됐고 '원'의 이름도 제비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연이가 38세에 죽자, 바위가 갈라지면서 큰 돌부처가 생겨났는데 사람들은 이 돌부처를 연이의 혼이 미륵불로 환생했다고 했다.
이 불상은 거대한 화강암 벽에 부처님의 전신을 새긴 입상이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의 머리 불두(佛頭)를 따로 제작해서 붙여놓은 형태다.
부처님의 불두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불상의 목을 쳐서 잘랐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또 다른 전설은 석공형제이야기다.
옛날에 어떤 형제가 석공 공부를 열심히 했다. 형제는 어느날 서로 돌을 다듬는 실력을 겨루기로 했다. 누가 먼저 미륵불을 잘 다듬느냐 겨루기로 하고 경쟁을 했다. 약속한 날까지 아우는 부지런히 돌을 갈고 다듬었고 형은 빈둥빈둥 놀았다. 아우는 그러나 미륵불의 불두를 완성하지 못했고 형은 미륵불의 머리를 만들었다. 형이 불두를 올리자 미륵불은 완성됐다.
안동시는 이 제비원 일대를 '솔씨공원'으로 지정, 성주풀이의 본향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나섰다.
우리 민요 성주풀이에서 "성주야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에 솔씨 받어 봄 동산에 던졌더니마는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황장목(黃腸木)이 되었구나. 돌이기둥이 되었네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쩍 벌어졌구나."라는 대목이 있다. 무속신앙의 중심인 성주신이 이 제비원 미륵석불인 셈이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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