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지난 6일(현지시간) 의회에 난입한 사태는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사태의 원인으로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 세력을 선동해 기름을 부은 것이 지적돼 더더욱 경악하게 된다. 미국 의회 유린 사태는 민주주의의 본산임을 자처하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제도가 위기에 처했다는 현실을 상징적이면서도 극적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이라 할 만한 의회에서 폭도로 변한 시위대들이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서 4명이나 사망하고 의원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상황이 빚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유린 사태를 방치하고 방관하다가 백악관 참모들의 채근이 잇따르자 그제서야 시위대들에게 진정을 호소했다. 이날 미국 의회에서는 상·하원 합동회의가 열려 대통령 선거인단의 조 바이든 당선인 승리를 최종적으로 인증하는 절차가 진행중이었는데 시위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의회에 난입했다. 바이든 당선인에 대한 승리 인증은 난동이 마무리되고 난 뒤에야 이뤄졌다.
이에 메가톤급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과 일부 장관들이 대통령에 실망해 줄줄이 사의를 표명했고 공화당 지도부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과 찰떡 호흡을 과시했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바이든의 당선 인증을 거부하라는 트럼프의 지시를 거부한 뒤 이번 사태까지 발생하자 등을 돌렸다. 트럼프는 사태 수습 과정에 나서지 않았고 펜스가 사태를 지휘하는 과정도 드러났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행동을 부추기고 사태 수습의 직무를 다하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말기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됐다.
바이든 당선인은 시위대의 행동이 시위가 아니라 반란이라며 맹렬히 비난하면서 사태 수습에 나서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다. 임기가 불과 10여일 밖에 남지 않은 트럼프에 대해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키고 끌어내릴 수 있는 수정헌법 25조를 발동해야 한다거나 탄핵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터져나오고 있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전직 대통령들이 트럼프를 강하게 비판했고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서방 국가들과 국제사회는 미국 민주주의의 부끄러운 일탈을 개탄했다.
의회 유린 사태로 절정에 달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일찍부터 지적돼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인종·다민족 국가로 '멜팅 팟'을 지향하는 미국의 가치를 정면으로 거슬러왔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면서까지 이민자 유입을 반대했고 주로 백인 보수층에 치중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 결과 인종 갈등이 심해져 사회적 소요가 발생했고 사회 분열 양상도 심각해졌다. 대외적으로는 '미국 우선주의'를 앞장세워 동맹을 경시하고 기존의 국제질서를 분별없이 뒤흔들었다. 이질적 요소가 잘 어우러져야 하는 국가를 이끌면서 언제나 통합을 추구해야 함에도 분열을 초래했고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해오던 역할을 가차없이 내던졌다. 이에 따라 트럼프의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예전처럼 존중받지 못했고 때로는 조롱도 받기까지 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트럼프의 등장 자체가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나타낸 신호였을 것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전 부동산 재벌로 성공하는 과정의 행적도 도마에 오를 정도로 논란이 많았던 인물이다. 대통령이 된 후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이 담긴 정책들을 내팽겨치면서 거짓뉴스를 인용하고 막말을 일삼는 등 격조가 떨어지는 면모를 드러냈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미국 중심적이며 분열 지향적이고 공감 능력도 떨어진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강하게 지닌 것으로 보여 심리학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대통령으로 결국 임기 말에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지난 2016년에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백인 하층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주력하면서 인종 갈등적인 노선과 미국 우선주의적 정책들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먹혀들어 당선으로 이어질 지는 몰랐다. 트럼프는 보수적인 백인 빈곤층의 분노를 자극했고 이를 정권 지지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비롯되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결국 경제적 양극화에 좌절한 표심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양극화가 정치의 양극화, 사회의 양극화로 이어졌고 경제적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위기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펼쳐졌다.

트럼프의 뒤를 이을 조 바이든 당선인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바이든 당선인은 트럼프의 기존 노선을 폐기하고 사회통합적 정책들을 내세우고 있지만 미국 국내 안정을 위해서는 경제 양극화를 조금이라도 해소해 나가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트럼프나 트럼프 같은 인물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언제든 다시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트럼프는 현직 프리미엄을 안고도 패한 단임 대통령이 되지만, 바이든과 대선 지지율 차이가 크지 않았고 최근에는 미국 내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정치적 영향력이 건재한 트럼프는 2024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시사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지속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바이든에게는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9월 국내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과거에는 신흥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 등으로 제도가 무너졌지만, 최근에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위기가 나타난다고 진단했다. 아담 쉐보르스키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를 인용, 민주적 제도와 규범이 점진적으로 침식되고 반민주 세력은 '도둑고양이'처럼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뿐만 아니라 트럼프와 같은 세계 도처의 스트롱맨들이 민주주의의 합법적 선거를 통해 등장해 교묘히 민주주의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인도·터키·브라질은 두 차례 이상의 정권 교체로 민주주의가 굳건해지는 듯 했지만 나렌드라 모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자이르 보우소나루 같은 스트롱맨들이 나타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같은 스트롱맨들도 독선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다. 의회를 통법부로 만들고 선택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편법을 일삼으며 민주주의가 가라앉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평화적인 시위와 제도를 통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대통령을 탄핵하고 후임 정부를 안정적으로 출범시켰지만, 민주주의의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언제든 있다. 우리 사회도 경제의 양극화가 극심하며 태극기부대 등 극우 세력과 반대 세력 간 갈등으로 정치적 긴장이 상존한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강해 정당 간 정치적 타협이 줄어들고 있으며 개혁을 둘러싼 다툼도 치열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민주주의의 안정적 기반을 흔들게 된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발명한 문물중 성공작으로 평가받지만, 이제는 전례없이 선진 국가들에서조차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주주의의 안정을 위해서는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을 줄여나감으로써 계층 간 대립 같은 부정적 현상을 없애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독선적인 지도자의 출현과 이에 대한 맹목적 지지, 그로 인한 분열과 증오를 막을 수 없다. 시민사회가 깨어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정치 세력들을 각성시키고 극단적인 무리들을 제어하는 것도 필수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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