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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1985, 차고 작업실

리우 영상설치작가
리우 영상설치작가

내 기억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묘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나의 대학 학번이기도 하다. 1년 간의 대학 새내기 생활을 끝내고 해가 바뀐 1985년, 나는 새로운 작업실로 이사를 했다. 도시의 변두리, 길가의 차고였다. 당시에는 곧 닥칠 '마이카 시대'를 준비라도 하듯 집집마다 차고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오지 않은 마이카 시대와 비어있는 차고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차고에 셔터를 달아 세를 놓곤 했다.

그때가 여름이었나? 동네 어머님 몇 분이 양복 차림의 신사 한 분과 함께 작업실로 찾아왔다. 영화 킹스맨의 콜린 퍼스처럼 매너가 뚝뚝 떨어지는 이 젊은 신사의 손에는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젊은 여인이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사진이었다. 야단스런 어머님들의 상황 설명은 이랬다. "아, 이 분이 집나간 여동생을 찾는대요. 서울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찾노. 그래서 우리가 여 화실 있는 거 알고 일로 안 델꼬 왔는교."

우선 화실로 들여 대화를 시작했는데 이 젊은 콜린 퍼스는 집이 서울이고, 유명한 의사집안 장남이며, 여동생이 반대하는 그림에 빠져 가출한 뒤로 연락이 닿지 않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해는 져서 캄캄하고, 사정을 들어보니 참 딱하고 애틋하니 어쩌겠나. 누추한 화실이지만 묵고 가랄 수밖에. 킹스맨 양복 윗옷을 벽에 걸고 되는대로 한 공간에 누웠는데, 이 양반은 어눌한 듯 공손하고 느린 듯 매너 있는 말투로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켰다. 초라한 화실의 곰팡이 핀 방에 누워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때 한참 해부학 공부를 할 때였는데, 콜린 퍼스는 병원으로 놀러 오면 인체모형뼈대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럭저럭 잠이 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악몽이라도 꾼 듯 소리를 지르며 콜린 퍼스가 벌떡 일어났다. 팔도 서너 번 휘저었던 것 같다. 나도 덩달아 잠에서 깨 괜찮으냐고 물었다. 아, 그런데 이 양반, 땀을 뻘뻘 흘리며 불안한 눈빛과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넋이 나갔다. 뭔가 알지 못할 사연이 있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간단한 식사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지갑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서울 갈 여비를 마련해줬다. 돈이야 돌려받건 말건 간에 나는 진심으로 그가 여동생을 찾기를 바랐다.

그렇게 가물가물 그날의 기억이 사라질 때쯤, 나는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즈음 대학가 주변을 돌며 여동생을 찾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화실에서는 같이 라면을 먹어가며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다는 거다.

그는 사기꾼이었을까? 그래봐야 푼돈일 텐데? 그 사진은 여동생이 맞을까? 의사 집안은 아니겠지? 그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요즘도 뜬금없이 떠오르는 숱한 의문 속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SNS와 비대면 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것.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은 어쩌면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과 따뜻한 정이 아니었을까?

리우 영상설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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