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 최장수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 기록을 가진 고(故) 헬렌 토머스 기자의 말이다. 토머스는 "대통령에 관한 한 기자들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기자회견은 국민을 대신해서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추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대통령에게 질문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의 말처럼 생중계되는 백악관 기자회견 장면에선 긴장감이 흐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11월 기자회견 석상에서 CNN 짐 아코스타 기자와 말싸움을 벌였다.
이민자 배척, 러시아 스캔들 관련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폭발한 것이다. "가짜 뉴스" "부끄러운 줄 알아라"는 삿대질에 이어 마이크를 빼앗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대로 '적대적 언론 환경'이라서 벌어진 일만은 아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르윈스키의 옷에 묻은 액체는 대통령 것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오바마 케어에 대한 말이 수시로 바뀐다" "지지율이 최저인데, 올해가 최악의 해인가요?" 등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됐다.
기자들이 악의로 대통령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다. 백악관이 아코스타 기자에 대해 출입금지 조치를 내리자 백악관 출입기자단은 성명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업무 수행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고, 기자단은 회원들이 대통령을 포함한 힘 센 공직자들에게 하는 질문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며 "이런 상호작용은 불편해 보이지만 우리 국가기관들의 힘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자들이 어렵고 불편한 질문을 하는 것은 대통령이 힘을 남용하지 못 하도록 견제하는 구실을 한다는 말이다. 자기 검열 없는 기자의 질문이 필요한 핵심적 이유이다.
18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열린다. 연례행사인 기자회견도 문제지만 내용 면에서도 미국과 같은 질문은 언감생심이다. 후속 질문은 물론 추궁성 질문도 없다. 조금만 불편하거나 날카로운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무례' 운운하는 극렬 지지자들의 표적이 된다. 기자들 탓만이 아니라 바탕이 되는 문화가 판이한 것이다.
"대통령께서는 신년사에서 부동산 문제에 관해 사과하셨습니다. 하지만 부동산만은 자신 있다거나 가격이 안정되고 있다는 말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과거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청와대 참모들의 장밋빛 보고서였는지, 국토부 장관의 장담인지, 그걸 포함한 여러 경로로 청취한 의견을 종합한 결과인지 궁금합니다."
"추미애·윤석열 갈등이 국정의 블랙홀이 되어도 대통령께서 전혀 언급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국 대통령께서 사과할 수밖에 없도록 방치한 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임무를 포기한 게 아닌가요? 윤 총장에 이어 최재형 감사원장에 대한 여권의 비난 공세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 총장, 최 원장 모두 우리가 임명한 공직자들입니다. 검찰은 검찰의 일을, 감사원은 감사원의 일을 하도록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맙시다'라고 당부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북한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대통령 개인과 대한민국을 모욕할 때 대통령님의 생각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특등 머저리라는 김여정의 비난이 과감히 대화하자는 요구라는 해석에 동의하시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북한의 조롱과 모욕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우리의 국민적 자존심이 구겨지는데도 못 들은 체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요?"
부동산 문제, 추·윤 갈등, 남북 대화 등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인식과 대처는 실망스러웠다. 국민은 현실과 동떨어진 대통령의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 권리가 있다. 대통령의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정책 방향은 국민 모두의 삶에 너무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벼슬의 높고 낮음에 근거하여 의견을 듣고, 여러 사람 말을 견주어 판단하지 않으며,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 의견만 참고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한비자)라는 경고를 상기할 필요도 있다.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왕이 아닌 국민의 공복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질문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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