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아들의 반성문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퇴근하니 서재에 학원 간 아들이 올려놓은 반성문이 있었다. 어제 거짓말 때문에 별일 아니게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커져서 본인도 혼비백산했는데, 오늘 또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참이었다.

"제가 여태껏 아들로 살아오면서 잘못한 게 100가지이고, 약속을 어긴 것도 100가지쯤 되지만, 약속을 지키고 바뀐 것도 수십가지는 되며, 단 하루도 노력하지 않은 날은 없다. 그러니 발전하고 있는 자신을 지켜봐달라."

반성문이라 하기엔 좀 색달랐지만 자신의 잘못보다 성장하고 있는 희망에 무게중심을 가져달라는 얘기에 미소가 지어졌다.

재활의학과 의사로 살면서 '과연 이 환자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활치료라는 게 수술 한 번, 1주간의 항생제치료로 말끔히 원상복구가 되는 게 아니다 보니 정확한 진단아래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치료계획이 만들어진다.

힘든 환자는 더 열심히 치료해야겠지만 "일단 치료 해보자,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이런 얘기는 사실 좀 무책임하다는 게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뇌손상이 있는 소아환자의 경우는 성인환자에 비해 뇌가소성이 뛰어나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회복력을 보이는 경우도 왕왕 있다. 수진이도 그런 환자였다. 4살이었나, 뇌와 뇌를 싸고 있는 경막, 그리고 척수까지 심한 염증이 생겨서 내가 병실에 갔을 때 수진이는 혼자 앉지도 못하고 삼키지 못해 코에 위루관(L-tube)를 꽂고 있었다. 당연히 '엄마' 소리도 못하는 상태였다.

소아과에서는 1년 내 사망가능성이 70%를 넘는다고 보고 있었다. 재활의학과로 의뢰가 난 건 치료가 길어지면서 환자가 쓰지 않는 팔다리 근육이 굳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울며 매달리는 보호자에게, 나는 그저 1%의 희망만 보겠다고 했다. 1%의 희망이 채워지면 그 다음 1%, 그 1%가 채워지면 그 다음 1%, 그러다보면 그 1%가 어느새 10%, 50%, 어쩌면 100%도 되지 않겠냐고.

그리고 수진이는 그걸 해냈다.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재활치료를 하고 나서는 소변문제를 빼고는 다 회복해서 혼자 걷고, 말하고, 인지나 운동기능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퇴원 후 외래진료실로 뛰어 들어오는 수진이를 안아주며 얼마나 가슴이 벅찼던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환자로 치면 당장 응급소생술을 해야 할 것 같고, 이후의 예후에 대해서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의 희망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수진이의 상태를 두고 죽을 지도 모르는 애한테 무슨 재활치료냐고 포기했더라면 수진이는 올해 고등학교를 못 들어갔을 수도 있다. 수진이는 내게 달려와 안길 수도 없었을 거고 엄마에게 자기를 낳아줘서 고맙다고 편지를 쓰지도 못했을 거다.

지금 누리는 모든 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두운 터널안에서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가게 했던 그 1%의 희망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터널안에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터널은 끝날 것이다. 그러니 1%만, 1%만 보자!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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