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단지 자신 앞에 보이는 것들만 그릴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보이는 것들도 그려야 한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캐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말이다.
그림으로 먹고 사는, 아니 살아야 하는 전업 작가들은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하기 위해 지난(至難)한 시간을 캔버스 앞에서 생각하고 번뇌한다. 자연의 대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일은 일정기간 수업과 훈련이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프리드리히의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화폭에 옮기기란 결코 녹록치 않다. 대개 자신만의 화풍이나 조형언어를 만들어내기까지 짧게는 10년, 그 이상의 시간들을 면벽 수행하는 선승처럼 시간을 갉아 먹어도 겨우 이룰까 말까하다. 설혹 화풍을 구축해서 화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더라도 '세인의 평가'라는 더 높고 혹독한 벽을 넘어서야 '작가'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조경희 작 '담다'는 주된 조형언어가 그릇이다. 그림은 흰색과 파란색 달랑 두 가지 색만 썼다. 파란색은 바탕이고 흰색은 그릇의 형태를 잡아주는 데 사용했다. 바탕을 이루는 파란색은 일단 붓질이 거칠고 굵다. 화면에 파란색을 이리저리 칠한 후 흰색으로 그릇 형상을 잡아 준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 화면 위와 아랫부분 그릇 크기가 비슷하다. 정물화처럼 어떤 대상을 놓고 그렸다면 이는 원근법의 무시이다. 그릇 크기가 동일한 것은 작가의 눈높이가 대상이 놓인 테이블보다 높아서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그렸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조경희는 마음 속 그릇들을 캔버스에 옮겨 놓은 셈이 된다.
작품 제목도 '담다'로 동사를 썼다. 동사는 행위를 나타내는 품사다. 사랑, 희망, 소망, 욕망, 명예, 보석, 곡식 등등 그릇을 모티브로 담을 수 있는 것은 엄청 많다. 조경희는 무엇을 담고 싶어 이리도 많은 빈 그릇을 캔버스에 담았을까?
거두절미하면 '가족의 행복'이다. 가족이 모이는 식탁, 따뜻한 밥, 함께 식사하는 행복이 모두 그릇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조경희의 그릇은 행복의 아이콘일 수밖에 없으며, 반복적인 그릇 작업은 행복을 자기 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릇은 채우면 비워지고 비우면 채워지는 속성이 있다. 행복도 늘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비워지면 채워야 한다. 그 비움과 채움의 선순환 작업이 작가의 그림이다. 그릇의 의미와 조형적인 반복 작업을 통해 찾게 되는 삶의 설렘 속에서 이제 조경희는 그 그릇에 자신을 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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