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사담은 떠나고

이진숙 전 대전MBC 대표이사
1990년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전쟁 여파로 이라크 삼등분 신세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그 결과는 국민 전체가 감당해야

이진숙 전 대전MBC 대표이사
이진숙 전 대전MBC 대표이사

1990년 5월, 필자는 바그다드에 있었다. 티그리스강 변에 위치한 호텔에 묵었는데, 그 이름도 '바그다드 호텔'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유서 깊은 호텔은 티그리스강 서쪽의 카르흐 지역에 있었다. 5월이면 흐드러지게 핀 협죽도가 티그리스강 변을 분홍빛으로 물들였고 간혹 바람이 불면 강변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지금이야 이라크 하면, 도시를 뒤집을 듯 퍼붓던 포탄과 함께 불의 도시가 된 바그다드를 떠올리지만 1990년 5월만 해도 바그다드는 평온한 도시였다. 저녁이면 손에 손을 잡은 가족들이 잉어 구이 마스구프를 먹으러 티그리스강 변의 아부누아스 거리로 몰려들었고, 식당에서는 원시적 욕망을 일깨우는 아랍 음악들이 귀를 사로잡았다. 그때만 해도 이라크는 '정상 국가'였다는 말이다.

1990년 5월의 바그다드는 그랬다. 1980년에서 1988년까지 무려 8년을 지속하던 이란과의 전쟁은 승자 없는 전쟁으로 끝이 났고, 국민들은 이제야 미래를 위한 설계를 할 수 있겠구나 믿었다. 희망은 석 달 만에 끝이 났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의 명령을 받은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의 국경을 넘었다. 당시 쿠웨이트 군대는 1만6천 명, 이라크 군대는 정규군만 95만 명이었다. 전력만으로 보아도 상대가 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쿠웨이트는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라크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20세기 마지막 전쟁의 시작이었다.

사담 후세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전쟁은 명분이 있었다. 이란과의 8년 전쟁은 사실상 미국을 위한 대리전이었다. 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은 친미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렸고, 미국민들은 외교관 등 52명의 미국인들이 444일 동안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악몽을 겪어야 했다. 1980년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을 벌였을 때 미국은 얼마나 이를 환영했겠는가. 반미를 부르짖는 이슬람근본주의를 사담 후세인이 막아 주었으니 말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후에 국방장관이 되는 도널드 럼스펠드를 특사로 파견해 사담 후세인을 만나도록 할 만큼 이라크는 미국에 필요한 존재였다. 각종 지원도 했다. 그러나 1990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하면서 미국은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고 '마지막 인류'로 스스로를 기록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작이었다.

미국을 위한 대리전을 치렀는데,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아랍국들에 거액의 빚만 지게 되었다. 쿠웨이트에 진 채무만도 140억달러(15조원)로 기록된다. 사담 후세인은 사우디와 쿠웨이트에 채무 탕감을 요구했지만 두 나라는 거부했다. 게다가 쿠웨이트는 하는 일마다 눈엣가시였다. 이라크의 주 수입원은 원유 수출, 그런데 쿠웨이트는 오펙(OPEC)의 생산 할당량보다 증산을 해서 유가를 떨어뜨리는가 하면 이라크와의 국경지대에서 이라크 쪽 원유를 빼가는 것이었다.(이라크 측 주장) 이라크 국민들의 불만도 한몫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귀가한 청년들에게 일자리는 없었고, 클린턴이 부르짖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이라크에서도 작동했다. 내부 불만을 돌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전쟁이라는 말을 사담 후세인은 믿었을까, 걸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1년의 걸프전과 2003년의 이라크전은 사담 후세인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두 차례의 대전으로 이라크는 삼등분되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사실상 독립 상태이고, 시아파가 권력을 잡았다. 수니파는 해체되어 일부는 21세기의 테러 집단 이슬람국가(IS·Islamic State)로 흡수되었다. 아들과 사위들은 살해되고 부인은 망명, 후세인 가문은 공중분해되었다. 그 가족뿐인가. 1991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서른 살이 된 지금, 삶 전체를 전쟁과 함께 보내야 했다. 이라크 사람들은 한 세대를 압류당한 셈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포탄에 목숨을 잃거나 사지를 절단해야 했던 국민들, 그들은 누구의 잘못으로 삶을 압류당했나. 그것은 지도자의 판단 때문이었다.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하면 그 결과는 본인은 물론 국민 전체가 뒤집어쓴다. 지도자의 판단력이 중요한 이유이며, 지도자 선택을 잘 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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