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 눈(雪)-羅隱(라은)

다들 눈이 오면 풍년이 온다는데 盡道豊年瑞(진도풍년서)

그래 풍년 그게 대체 어쨌다는 건가 豊年事若何(풍년사약하)

서울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은데 長安有貧者(장안유빈자)

눈이 많이 오면 안 되고 말고 라네 爲瑞不宜多(위서불의다)

난데없이 함박눈이 펄펄 내리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동네 강아지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눈 내리는 들판 속에서 눈을 뒤집어쓴 채 서로 뒤엉켜서 마구 나뒹군다. 얼마나 신나게 꼬리를 흔드는지, 저러다가 혹시 꼬리가 부러질까 걱정이 덜컥 될 정도다. 신이 나기는 개구쟁이 아이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며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춘다.

어른들도 나름대로 감회가 새롭다. 그들 가운데는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면서 놓쳐버린 첫사랑을 생각하는 낭만주의자도 드문드문 있다. 하지만 나이든 축들은 대부분 눈이 좀 풍성하게 내리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현실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꼭 믿는 것은 아니지만,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는 민간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먹고 사는 문제가 발등의 불이었던 시절이니까, 눈이 많이 내려 풍년이 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틀림없이 있는 법이라서, 사람들 모두가 눈이 많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눈이 많이 내려 풍년이 들면 좋기야 물론 좋겠지만, 풍년은 내년이 되어야 비로소 오는 것. 내년이 되기도 전에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내년의 풍년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신문지를 이불 삼아 혹독한 겨울을 넘겨야 하는 노숙자들에게는 내년의 풍년보다 눈앞에 닥친 혹독한 눈보라가 지금 당장 넘어야 할, 아찔하기 짝이 없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이다. 그러니 설사 내년에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지금 눈이 많이 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가 없다.

'화로를 피운 방 안에서/

주인어른이 창문을 열고 과일을 사 오라며 말씀하신다/

"춥지도 않은 날에 불을 너무 많이 피웠어/

열이 나 못살겠군!"

처마 밑 거지 하나/

북풍에 이를 으드득 갈며 죽을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처마 밑과 안방 사이엔/

단지 얇은 창호지 한 장뿐'

근세 중국의 시인 유복(劉復: 1891-1934)의 시 '창호지 한 장 사이로'이다. 창호지 한 장을 사이에 두고도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이토록 다르다. 정치란 게 뭘까?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서로 다른 마음들을 잘 조절하여 우리 모두가 화해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일 게다. 잘하고 있는가? 올해는 좀 잘해 봐라, 제발!

이종문 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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