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학 도서관을 가다-경북대] 조선지위인(朝鮮之偉人)

지금, 당신의 위인은 누구인가요?

'조선지위인'의 목차.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된 10대 위인 외에 김옥균과 전봉준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지위인'의 목차.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된 10대 위인 외에 김옥균과 전봉준이 포함되어 있다.

1922년, 식민지 조선에서 출판된 '조선지위인(朝鮮之偉人)'은 서가 한편에 심상하게 놓여 있었다. 모서리가 닳아 손끝에서 스르르 빠지는 책장을 잡아채며 책이 지나온 시간을 상상해 본다. 이렇게 오래되어 겉장이 나달나달한 책을 펼쳐 종이 냄새를 맡으면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는 힘들 것이라던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절절히 실감하게 된다. 거추장스러운 별도의 장치 없이 오래 전 인쇄된 책을 그저 펼치는 것만으로 내용에 접근할 수 있으니 말이다.

192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 천도교 교단의 자금으로 잡지를 발간하던 개벽사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조선의 10대 위인 투표를 실시했다. 개벽사는 잡지 지면을 통해 이 이벤트를 대대적으로 광고했고, 몇 천 명의 독자가 투표에 참여했다. 이 시기의 문맹률이나 비용을 들여 엽서를 보내야 하는 수고로움을 고려하면 투표에 참여했던 독자들의 열기는 상당히 뜨거운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시청자들이 투표로 아이돌을 선발하는 프로듀스 101의 성공이 우연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투표로 선정되었던 10대 위인은 솔거, 최치원, 최충, 문익점, 서경덕, 이황, 이이, 이순신, 최제우, 유길준이었다. 이들은 각각 조선의 예술, 문학, 교육, 산업, 과학, 사상, 정치, 군사, 종교, 사회 개선 분야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꼽혔다. 이듬해 개벽사의 주필이던 김기전은 이들 위인의 업적을 해설하여 책으로 엮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조선지위인'이라는 책이다.

'조선지위인'에는 독자들이 뽑은 위인 외에도 두 명이 추가되었다. 김기전은 굳이 부록이라는 형식을 택해 김옥균과 전봉준을 책 뒷부분에 포함시켰다. 투표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 둘을 위인의 반열에 나란히 놓고자 했던 것이다. 김옥균과 전봉준은 각각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라는 미완의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경술국치 이후 10여 년이 경과하고 연전의 3.1운동마저 좌절되었던 1922년의 조선에서 이들은 조선의 앞에 펼쳐질 수 있었으나, 끝내 가지 못한 길이었다. 목차의 '부록'이라는 굵은 글자 위로 당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회한이 스친다.

경북대도서관에는 1922년에 인쇄된 초판본뿐 아니라, 1926년 재판본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 '조선지위인'은 재판을 찍고, 출판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에도 베스트셀러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책이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들은 반만 년의 지난 역사를 훑어 뛰어난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리고 최치원, 이순신을 비롯한 위인들의 구체적인 업적을 살핌으로써 조선의 영예로운 과거를 곱씹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과정은 독자들에게 손상된 민족적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위인으로 꼽히는 인물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위인들은 당대의 필요에 의해 호명된다. 식민지 시기 내내 위인전과 각종 서사물에 빈번하게 등장했던 것은 이순신이었다. 최근에는 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김만덕 등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 인물의 위인전이 속속 출판되었다. 그리고 대중문화, K-컬처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듯 방탄소년단이나 아이유 등 K-팝스타의 위인전이 시중에 나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만약 2021년의 위인을 투표로 뽑는다면 어떤 인물이 새롭게 등장할지 새삼 궁금해진다. 지금, 당신의 위인은 누구인가요?

김도경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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