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더 시크릿'

영화 '더 시크릿'의 한 장면
영화 '더 시크릿'의 한 장면

21일 개봉한 '더 시크릿'(감독 유발 아들러)은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복수와 진실 찾기를 그린 스릴러다.

종전은 전쟁의 끝이 아니다. 개인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지는 않는다. 전쟁의 아픈 기억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당사자를 괴롭힌다. 특히 여성들이 겪은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트라우마는 더욱 심하다.

여기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여인이 있다. 1959년 미국에 살고 있는 루마니아 출신의 마야(누미 라파스). 그녀는 남편 루이스(크리스 메시나)와 아들 패트릭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어느 날 공원에서 이상한 휘파람 소리를 듣게 된다. 그 휘파람은 그녀가 감추고 싶었던 15년 전 끔찍한 기억을 소환한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마야는 여동생과 함께 술 취한 독일군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다. 휘파람의 주인공은 그때도 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마야는 그 남자(조엘 킨나만)를 납치해 지하실에 가두고 심문한다.

그러나 그는 완강히 부인한다. 독일인이 아니고 스위스인이며 군인도 아니었다고 결백을 주장한다. 아내와 아이가 있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15년 전 기억이다. 너무나 짧은 순간 당한 것이라 기억마저 파편적이다. 악몽으로 심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이 여인의 확신을 믿을 수 있을까. 유럽도 아닌 미국, 그 남자일 확률은 너무나 낮다.

영화는 혹 마야의 집착이 빚어낸 오해가 아닐까 한 차례 흔들린다. 유럽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 루이스는 군의관 출신이다. 그에게 비교적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맡긴다. 그러면서 둘의 갈등이 빚어진다.

영화 '더 시크릿'의 한 장면
영화 '더 시크릿'의 한 장면

'더 시크릿'은 여러모로 '시고니 위버의 진실'(1994)을 연상시키는 영화다. 이 영화는 남미를 배경으로 15년 전 독재정권에서 비인간적인 고문으로 고통받는 여인이 주인공이다. 우연히 이웃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를 틀어놓고 자신에게 전기고문과 성폭행을 가했던 바로 그 의사인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를 납치해 묶고 진실을 추궁한다.

극적 플롯은 너무나 흡사하다.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복수와 용서의 딜레마에 빠지는 구성이다. 감독 유발 아들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소재로 한 영화 '베들레헴'(2013)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더 시크릿'에서도 공동 각본으로 이름을 올렸다.

'시고니 위버의 진실'에 비해 다소 사적이며 사건을 둘러싼 경험도 지엽적이다. 그래서 영화의 울림이나 긴장감은 약한 편이다. 루이스가 아내와 남자의 상반된 주장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에도 드라마의 상투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마야 역의 누미 라파스는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연기를 펼친다. 그녀는 2019년작 '엔젤 오브 마인'에서도 이와 유사한 캐릭터를 맡은 적이 있었다. 옆집 아이가 7년 전 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확신한 엄마 역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상실감에 빠진 한 엄마의 집착과 광기라고만 여긴다.

'더 시크릿'의 마야 또한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고독한 싸움을 해야 한다. 누미 라파스는 이런 역할이 제법 잘 어울리는 배우다. 혼자 싸우는 외로운 여전사역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2012)에서도 그랬고,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스웨덴 스릴러 '밀레니엄' 3부작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그녀의 모든 캐릭터에는 강한 이미지가 바닥에 깔려 있다.

영화 '더 시크릿'의 한 장면
영화 '더 시크릿'의 한 장면

'더 시크릿'에서는 강한 면모와 함께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세 살 어린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혼자 도망친 것에 대한 기억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힌다. 가해자에게 듣고 싶은 것도 그때의 진실이다.

'더 시크릿'은 누미 라파스가 총괄 프로듀서까지 맡아 애착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러나 한 여인의 복수를 소재로 한 심리극으로서는 연출의 치밀함이나 시나리오의 신선함이란 측면에서 아쉬운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전쟁이 얼마나 개인의 삶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지에 대한 경각심은 잘 보여주고 있다. 100년 가까운 시간에도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는 트라우마를 우리는 지금도 실감하고 있지 않는가. 98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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