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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소”값은 떠러지는데 “소고기”값은 왜 올라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2월5일 자 2면 기사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2월5일 자 2면 기사

'소값은 날로 떨어지고 있는 반면 소고기값은 한번 인상된 채 가격의 변동이 전연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사실인가 하는 일반의 여론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 ~(소값은)대폭 저락 시세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작년 6월 22일 식육업자 조합단과 부 당국에 체결된 정육 근당 230원이란 무변동 가격에는 커다란 차이를 두고 있어 일반소비 대상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는데 당국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2월 15일 자)

소값이 떨어지면 소고기값은 내릴까. 새해가 밝자 소값이 하락했다. 대구부민들은 입맛부터 다셨다. 고깃값이 내려 소고기를 맛볼 수 있으리란 기대였다. 소고기는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부민들의 원기를 회복하는 음식으로 그만이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어쩌다 소값이 내려도 이미 오른 소고기값은 요지부동이었다. 부 당국을 원망해도 소용없었다. 1949년은 올해처럼 소띠 해였다.

당시 농우 한 마리는 8만 원을 오르내렸다. 이는 1년 전의 가을보다 30%나 내렸다. 소값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해방 후 치솟기만 하던 물가는 1948년 봄부터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보릿고개를 앞두고 식료품만 약간의 오름세를 이어갔다. 고무신 같은 일상용품도 하나 둘 내렸다. 왜 그랬을까. 해방이후의 사회적 혼란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시점과 맞물렸다. 경제적으로는 저축강조운동으로 저축액이 늘었다. 또 추곡수집자금이 순조롭게 지급되면서 경제활동에 숨통을 틔었다. 전체적으로는 통화량이 축소되면서 물가의 오름세가 진정되었다.

소는 농가에 없어서는 안 될 일꾼 중의 일꾼이었다. 국가차원에서 소의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소고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육류였다. 농우든 육우든 소의 공급과 수요를 적절히 맞추는 일이 중요했다. 그해 말에 소값이 다소 안정되자 소고기 한 근 값을 400원에서 500원으로 올리겠다는 식육상 조합의 결정이 있었다. 하지만 당국은 이를 저지했다. 고깃값이 오르면 농가에서 소를 내다팔게 된다는 이유였다. 농가에서 소를 팔면 그만큼의 일손이 줄어 수확량이 줄어들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소고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비량이 많았다. 1938년의 경우 대구부민이 그 해에 쓴 식육비는 60만원이었다. 소가 3천900마리로 55만원을 차지해 대부분이었다. 돼지와 염소, 말이 그 뒤를 이었다. 돼지고기와 닭고기의 소비량이 소고기보다 많은 지금과는 달랐다. 이러니 소고기 값이 조금만 올라도 부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부유한 집안에서만 고기를 사먹게 된다는 불만이었다. 당국은 고기값을 마음대로 올린 업소를 단속 하겠다고 부민들을 달랬다.

소 사육두수와 상관없이 과거에는 기상재해로 소값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심한 가뭄 등이 닥치면 소값이 내렸다. 사람조차 입에 풀칠할 양식이 없는데 소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소가 먹는 꼴까지 다 말랐으니 농가에서는 소를 내다파는 일이 예사였다. 하지만 소값 파동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소는 다시 돌아왔다. 다만 소값은 떨어져도 소고기값이 그대로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소띠 해인 신축년 새해에도 코로나19의 시름은 여전히 깊다. 그때의 소값 파동과는 아예 견줄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우보천리'(牛步千里)는 고사하고 한걸음을 떼기도 버거워하는 사람이 널렸으니 말이다.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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