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왕실모독죄'를 적용한 검거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거세게 일어나더니 코로나19 재확산 사태로 잠정 중단된 사이 태국 정부가 반격에 나서는 양상이다. 지난해 11월초부터 지금까지 반정부 인사 40여 명이 체포돼 '왕실모독죄' 적용을 받았다. 지난 19일에는 60대 전직 여성 공무원이 왕실모독죄 29건을 저지른 혐의로 징역 43년을 선고받았다.
'왕실모독죄'의 화살은 반정부 핵심 인사인 타나톤 중룽르앙낏 전 퓨처포워드당(FFP) 대표를 향하고 있다. 그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정부의 백신 전략 전반을 비판하면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태국에서 생산하는 왕실 소유 시암 바이오사이언스사(社)의 계약 세부사항 공개 등을 요구하다 태국 정부로부터 수사 기관에 고발당했다. FFP는 정부와 대립하던 제3당으로 지난해 2월 법재판소에 의해 강제해산 및 지도부 정치활동 10년 금지 판결을 받은 바 있다.
태국 형법 112조에 규정된 왕실모독죄는 왕과 왕비 등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왕가에 대한 부정적 묘사 등을 하는 경우 죄목 당 최고 징역 15년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왕실모독 사례가 다수이면 형량이 훨씬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왕실모독죄는 1908년 제정 이후 1976년 처벌 수준이 한 차례 강화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또 왕실모독죄는 적용 대상이 광범위하고 모호하며 재판은 '국가안보'라는 이유를 들어 비밀리에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문에 유엔과 앰네스티인터내셔널, 휴먼라이츠워치 등 국제사회와 인권단체들은 '왕실모독죄'가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며 법 적용을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태국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왕실모독죄는 태국 왕실이 법 적용을 요구한 적이 없으며 주로 정부가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적용돼 왔다. 태국 정부는 2018년 이후 왕실모독죄 조항을 적용하지 않다가 지난해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민주화를 외치자 다시 칼을 빼들었다. 태국의 민주화 시위는 군정 종식, 개헌 및 총선 재실시와 함께 왕실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전국적으로 거세게 벌어진 시위는 태국 헌정사에 중대한 분수령이 될수도 있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아왔다.
태국의 민주화 시위에는 뿌리 깊은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 태국은 왕실의 권위와 영향력이 막강하며 군부의 입김도 매우 강한 나라이다.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지만 국왕이 권력을 휘두를 때도 적지 않아 절대군주제적인 측면이 있다. 이를 빗대 외국의 한 학자는 태국이 '요상한 군주제'의 나라라고 비꼬기도 한다. 군부도 잦은 쿠데타와 현실 정치에 참여해왔다. 현 쁘라윳 짠오차 총리도 육군 참모총장 출신으로 2014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군복을 벗고 정치에 뛰어든 인물이다. 이처럼 막강한 왕실과 군부는 서로 결탁해 일종의 '견고한 동맹'을 구축하고 있으며 민주화 시위는 이를 개혁하기 위해 일어나게 됐다.
태국 국왕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이를 승인하고 군부는 정권을 잡은 후 국왕을 추앙해 왕의 권위를 더 높여왔다. 2016년에 사망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대표적 인물로 군부와 보수적인 정치계, 학계, 언론 등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입어 신처럼 떠받들려졌다. 그로 말미암아 태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도 함께 따라왔다. 왕실과 군부의 결합은 왕실모독죄와 함께 작동해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태국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은 자유의 한계에 부딪혔고 분노와 좌절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태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몇차례 변곡점을 살펴볼 수 있다. 1세기도 더 전에 성군으로 추앙받던 라마 5세 쭐라롱껀 대왕(재위 기간 1868년~1910년)은 아들인 라마 6세 왓치라웃 국왕(재위기간 1910년~1925년)에게 서구 민주주의 도입을 고려해보라는 유지를 전했다. 그러나 왓치라웃 국왕은 오히려 절대군주제를 옹호했다. 라마 7세 프라짜티뽁 왕(재위기간 1925년~1935년) 시기인 1932년에 왕정에 불만을 가진 문민-군부 엘리트들의 혁명이 발생, 절대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 당시에 국가는 국왕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임을 선언한 혁명 정신이 선포됐다.
혁명의 주역인 인민당의 쁘리디 파놈용은 태국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의 개혁노선은 1940년대 중-후반 군부-왕당파 동맹에 의해 좌초되었다. 쁘리디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왕실은 서서히 기존의 위엄을 되찾았다. 이 당시 창당된 민주당은 왕당파의 아성이 되었다. 입헌 혁명은 미완의 실패로 막을 내렸다.
1946년에 라마 9세인 푸미폰 국왕이 왕위에 올라 70년 동안 자발적 혹은 강압적 복종을 기반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1976년 10월에 푸미폰 국왕이 군 출신 총리와 비밀리에 회동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실 비판 여론이 일었다. 이때 비판적인 학생들이 공권력과 정체불명의 폭도들에게 급습 당해 많이 죽거나 정글로 피신하였다. '혹 뚤라'(10월6일이란 의미)로 일컬어지는 이 유혈사태 이후 국왕모독죄 처벌 수위도 강화되었다.
2001년에는 왕실과 거리를 두려는 탁신 친나왓이 총리에 당선돼 태국 왕실을 순수한 '입헌군주제'로 되돌리려고 했다. 그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며 왕실의 지지 기반인 농촌에서 인기가 높아졌으나 부패 행각이 드러나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후 친탁신파와 반탁신파의 갈등이 시작됐고 2011년에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집권했으나 역시 2014년에 쿠데타로 물러났다. 두 차례 쿠데타는 푸미폰 국왕 승인 하에 이뤄졌다.
푸미폰 국왕의 뒤를 이어 2016년 10월에 즉위한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입헌군주제'를 무시하고 '절대군주제'에 집착했다. 그는 쁘라윳 총리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쁘라윳 총리 주도로 '왕권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새 헌법을 만들게 했다. 왕실 재산에 대한 전권을 왕에게 일임하도록 하고 수도 방콕에 본부를 둔 모든 군부대를 자신의 휘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왕권을 전례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군부는 반대 급부로 상원의원 임명권을 사실상 확보해 이들이 총리 선출에 참여해 총선이 있더라도 군부가 원하는 정권이 들어서도록 하였다.
군사정변이 있을 때마다, 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시위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왕실모독죄가 발효돼 체포되고 수감되는 인권 유린이 발생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민주화 시위는 이에 대한 좌절과 절망, 분노가 응축돼 폭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위대는 왕과 왕실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현실을 깨트리고자 1932년 입헌혁명 정신을 소환, 혁명 완성에 나서겠다고 천명했다.
태국의 반정부 시위대는 쁘라윳 정부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그 위에 군림해 온 왕실부터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왕을 정점으로 한 질식할 듯한 사회·정치적 질서가 민주화 시위를 불러왔고 군부 세력은 권력 장악을 위해 군주제의 정당성을 남용하는 바람에 왕과 군부 모두 위기에 처했다. 정부는 이를 타개하고자 '왕실모독죄'를 빌미로 시위대 탄압에 나서고 있다. 코로나19로 주춤한 시위대가 이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재궐기할 것인지 태국의 민주화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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