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종대의 우리나라 고사성어] 우혁좌초(右革左草)

임종대
임종대

'우혁(右革)'은 오른발에 가죽신이고, '좌초(左草)'는 왼발엔 짚신이란 뜻이다. 임제(林悌1549~1587)는 대문장가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붕당 폐해를 신발로 풍자했다. 임제의 본관은 나주(羅州)요 호는 백호(白湖)로, 교속(敎束)에 매임이 없다고 '연암집(燕巖集)'에 전한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진(晉)의 아들로 조부(祖父) 붕(鵬)은 승지부윤(承旨府尹)을 지냈으며, 중부(仲父) 복(復)은 선초에 박사(博士)로 백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백호는 1577년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과거에 급제하여 제주목사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예조정랑(禮曺正郞)과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31세에 평안도사(平安都事)로 임명됐다가 임기를 마치고 병증으로 객사에 머물렀다. 문인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부벽루상영록'이다. 기록에는 사대부가 황진이 묘 앞에서 시를 읊어 벼슬을 거두었다고 나오는데 사실과 다르다. 백호는 호방한 성격에 '스스로 바르지 못한 마음은 자신을 해친다면서, 쇠의 녹이 쇠에서 생긴 것이지만 쇠를 먹듯 나쁜 생각은 스스로를 해친다' 했다. 임찬일은 '임제 소설'에서 바람이 그냥 스쳐가는 것 같지만 산야의 생명을 길러 내고, 물은 땅위의 많은 생명을 성장시켜 놓는다. '하늘이 나를 불러 세상에 보낼 적에 몇날 며칠만 다녀와라. 몸 받아 살 때 사랑부터 하라. 미움까지도 사랑으로 접어 살라. 삶을 꽃으로 피워 살고, 죽은 뒤엔 향기로 남으라. 눈꺼풀이 내려지면 이승에서 깨달을 수 없는 잠을 까치가 입에 물고 하늘로 오르리라' 하였다.

당시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휩싸여 '천자는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백호는 '중국 상고에 태어났다면 그까짓 돌림천자(輪番天子) 쯤은 몇 번도 했다'면서 오호(五胡)와 북적(北狄), 남만(南蠻), 서융(西戎)이 각각 황제라 칭하는데, 우리 조선(朝鮮;東夷)만 못했다. 반도에서 옹졸하게 살 바에야 산들 무엇하며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내가 죽은 뒤에 곡을 하지 말라' 사후불곡(死後不哭)을 당부했다.

백호는 보수철학에 갇혀 기득권이 신음하는 백성들을 못 본체 하자, 작품을 통하여 검은 구름사이로 쏟아내는 햇살처럼 붕당의 빗장을 걷어내라고 외쳤다. 막 입문한 유생들까지 붕당에 뛰어들자 정으로 바위를 쪼개듯 '수성지'와 시문을 통해 피맺히게 호소했다.

어느 날 백호가 말을 타고 외출을 하는데 오른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왼발엔 짚신을 신는 것이었다. 마부가 이를 보고 깜짝 놀라서 말했다.

"신발이 제짝이 아닙니다."

그러자 백호가 조용히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오른쪽에서 본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고, 왼쪽에서 본 사람은 짚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누가 짝이 맞지 않는 신을 신었다고 하겠느냐?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가죽신은 동(東)인, 짚신은 배고픈 서(西)인이다. 짚신은 오합혜(五合鞋)와 촘촘하게 삼은 십합혜(十合鞋)가 있다. 십합혜는 큰길을 걷고 오합혜는 느슨하여 산길을 걸을 때 벌레가 밟혀 상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기득권자들의 마음은 하층민에 대한 배려가 그림의 떡이었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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