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색과 회색이 뒤섞인 인물상에 붓놀림은 거침이 없다. 인물상 또한 형태가 매끄럽지 않고 반구상이나 추상화에 닿아있다. 언뜻 보아 여인임을 겨우 인지할 정도로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다른 그림엔 여러 인간군상이 모여 있다. 빠른 붓질 탓인지 몇몇 곳의 화면에 물감이 흘러내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전시장에 들면 정면 벽에 있는 대형 그림은 위쪽은 여인의 상반신이 컬러로 제작됐고 아래쪽은 온통 검은색으로 짙은 어둠에 묻혀있다. 마치 두 작품을 이어 붙인 듯한 그림은 하나씩 떼어내고 제각기 또 다른 작품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대구 우손갤러리가 열고 있는 영국 여류작가 로라 랑캐스터(Laura Lancaster·42)의 개인전 'Inside the Mirror'(거울 속으로)전의 풍경이다. 2014년 국내 첫 전시에서 탁월한 회화적 관능미를 선보였던 로라 랑캐스터가 한층 성숙한 작품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대구에서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로라 랑캐스터는 자아와 타자와의 만남이 일어날 수 있는 영역으로서 서구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상징적 의미로 사용됐던 '거울'을 그녀의 그림에 끌어들였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된 '큰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에 서 있는 여인'이라는 작품은 거울을 통해 그림 속 인물은 사진처럼 복제되고, 관람객은 그림 밖의 현실 세계에서 그림 속 인물의 실제 뒷모습과 거울에 비친 복제된 앞모습의 양면을 모두 보게 그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3인칭 관찰자로서 관람객은 '그림 속 현실'과 그림 안 '거울 속의 가상현실' 및 관람객이 실재하는 '현실의 공간'이라는 각기 다른 세 개의 현실을 목격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니라 로라 랑캐스터의 회화가 과거와 현재, 역사와 기억, 나아가 자아와 타자 사이를 오가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망설임 없이 놀린 대담한 붓질은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추상표현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구체성을 잃은 대상은 추상과 구상의 모호한 영역에서 기억과 상상 사이의 넘나들며 오히려 수많은 대상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고, 이런 가운데 '거울'이라는 메타포는 단지 대상을 복제하거나 투영하는데 거치지 않고 가상과 현실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관람객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줌(렌즈) 역할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로라 랑캐스터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면서부터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신과 똑같은 언니의 존재를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관찰해왔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러한 삶의 조건이 그녀의 회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거장들의 작품이 단순함에서 힘을 보이듯 로라 랑캐스터의 회화도 그 그림 내부에 잠재된 수수께끼에 주목한다면 관람의 묘미를 더욱 높일 수 있다. 전시는 3월 5일(금)까지. 053)427-7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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