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한관식 작가 모친 故 최갑생(경자) 씨

다시 태어나도 어머니 아들 할래요

한관식 씨 모친 최갑생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한관식 씨 모친 최갑생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충효리 한돈수님과 두마리 최경자님이 69년 전 백년가약을 맺었다. 꽃가마에 실려 몇 개의 고갯길을 넘으면서 두고 온 고향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새롭게 펼쳐질 앞날과 당신의 지아비가 못내 궁금하였지만 속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구불거리는 둘레 길을 덜컹거리며 겨우 도착한 마을은 여전히 시골부락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뿌리째 옮겨온 당신의 몸을 옹이가 박힐 때까지 '한씨네' 귀신으로 살기 위해 서툴고 낯선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람에 풀잎이 눕듯, 바람에 강물이 흐르듯 세상 이치를 담아 당신은 부뚜막에서 끼니를 때웠다. 머슴도 두서넛 둔, 기침깨나 하는 소작농으로 보릿고개 시절도 온전히 배를 곪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셈이 밝아서 산판일로 분주하였다. 먼발치에서 본 산 능선도 어림짐작으로 나무 값을 휘둘러도 신통하게 손해는 보지 않고 제값을 받았다. 그 덕분에 여윳돈을 챙긴 당신의 지아비는 읍내에 터를 잡아 목재소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즈음 읍내는 육군3사관학교의 전신 단기사관학교가 들어설 무렵이었다.

자연히 방석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그에 걸맞는 마작판이 성행했다. 인간 고유의 사행심에 푹 빠진 당신의 지아비는, 밤낮으로 몸을 혹사시킨 대가는 명약관화했다. 아들 셋과 당신을 두고 요절하였다. 오랜 암투병이 가져온 경제적 타격은 실로 젊은 여성이 짊어지고 가기에는 감당하기 어렵고 벅차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아들 셋 딸린 과부라는 현실은 그 어떤 고난도 감내해야만 했다.

작은 담배포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당신은 더 강해지기 위해 최경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최갑생으로 개명을 하였다. 세대주의 이름이 나약하게 되면 그나마 힘겹게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우려로, 단단한 골격이 있는 이름으로 호명되길 원했다.

나는 아들 셋 중 막내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겉멋이 들어 가출을 밥 먹듯이 했다. 뚜렷한 꿈도 없었고 구체적인 삶의 대안도 없었다. 막연히 깃든 역마로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툭 하면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금 생각하면 소똥밭에 굴러도 서울만 가면 숨통이 트일 것 같은 '서울동경'병을 앓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1978년도(고2)도 여전히 가출을 했고, 1979년도(고3)도 여전히 가출을 했다. 그때마다 당신은 언제나 문을 열어주었고 따뜻이 받아주었다. 되먹지 않는 글줄을 쓴다는 핑계로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운전학원으로 보내면서 폼 나게 살아보라고 한 당신의 깊은 마음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낀다. 월드컵 4강신화가 있던 2002년 그해 '금주'를 선언하고 지금까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면 당신의 심지를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한관식 씨와 최갑생 씨 가족사진. 가족제공.
한관식 씨와 최갑생 씨 가족사진. 가족제공.

그즈음 어머니는 간암4기 판정을 받았다. 큰형이 서둘러 서울 삼성병원에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날, 수원역에서 형을 만나기로 했다. 영천역에 차를 주차해두고 어머니와 처음으로 나란히 동행 길에 올랐다. 역사를 지나며 사람들의 자분자분 거리는 말소리, 회양목을 지나는 바람소리, 술래 잡는 아이들 함성소리, 분수 아래를 흐르는 얕은 물소리, 그리고 걸음이 힘겨운 어머니의 지친 손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차갑고 건조한 어머니의 체온에서 이제 그 모든 소리들은 한갓 내안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밀려나고, 화들짝 전달되어 오는 사람의 체온이 아닌 이미 싸늘하면서 이미 기력이 다한 점점점 말줄임표에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아아, 나는 당신의 아들이면서 이렇듯 철저히 식어가고 있는 진행을 모르고 있었구나. 내손을 움켜잡은 어머니의 느린 보폭으로 대합실에 들어가 다시 한 번 기차시간을 확인했다.

그날의 기억 속에 이정표이고 버팀목인 내손을 당신은 결코 놓지 않았다. 탑승 출구로 가기위해 대합실에서 나왔을 때, 어머니의 보폭이 더 잦아들고 있었다. 난분분 쏟아지는 봄날의 여린 햇살들이 꽃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돌아가신지 벌써 십 사년이 되었다. 굴곡진 삶이 이어질 때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받쳐주고 끌어주던 따뜻한 손길은 분명 어머니라는 사실에 한 표를 건다. 절망하지마라. 포기하지마라. 늘 그렇게 응원해주셨으니까.

62살이 된 지금의 나는 그나마 온기를 찾아 등 따습고 배부른 수더분한 저녁에 당도해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정말 꿈만 같다. 간혹 생생히 보이는 추억의 문을 열어 어머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다시 태어나도 어머니 아들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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