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구 안동역과 철로에 묻힌 신라 되찾아야

권영시 '보각국사비명 따라 일연의 생애를 걷다' 저자

권영시
권영시

안동역사 이전으로 생겨난 철도 역사 부지와 안동 36사단 부지 이전 및 활용과 관련한 뉴스를 얼마 전 접하고, 급히 안동읍지 '영가지'(永嘉誌)를 찾아봤다. 이는 1602년에 시작, 1608년에 완성된 안동의 역사지리지로, 권기(權紀)가 찬술했다. 서애 류성룡의 권유와 안동부사 한강 정구에 힘입었다. 그는 만년에 조정에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부모상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이러한 '영가지'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담았다. 고적 조에 법흥사와 법림사를 기록하면서 모두 '지금 세 칸만 남아 있다'고 했다. '법림사에는 흙으로 만든 부처 셋과 흙으로 만든 코끼리와 사자 각 한 개씩 있다' '지당은 길이 36척 너비 10척이다. 못 가운데 돌로 만든 코끼리와 용이 있다. 청련(靑蓮)이 한 그루 있는데 30년 만에 한 번 꽃이 핀다'고 기록됐다. 고탑 조에서 '법흥사 전탑(甎塔)은 부성의 동쪽 5리에 있다. 7층이며, 본부의 대비보이다. 성화 정미년(1487)에 고쳐 쌓았는데 위에는 금동 장식이 있었다. 이고(李股)가 철거하여 관청에 냈는데, 녹여서 객사에 사용하는 집기로 만들었다. 또 법림사 전탑은 부성의 남문 밖에 있으며 7층이다. 본부의 대비보이다. (탑) 위에는 법흥사 탑과 같은 장식이 있다. 만력 무술년(1598) 명나라 장군 양등산의 군인들이 철거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법흥사 절터에는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과 중앙선 철도가 놓여 있다. 종택은 탑동파 분파조 증손 후식공이 1708년에 지은 것으로, 2004년 발행 '고성 이씨 안동 전거 연원과 문화유산' 책자 중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신라시대 거찰인 법흥사 구지를 개기하여 수많은 동자 부처와 16척의 금불상을 낙동강에 버리고 기공함에 노승이 견몽하여 '이 터는 내 터이니 아무도 집을 지을 수 없다' 하여 '기어이 집을 지으면 큰 앙화를 당할 것이다' 하고 위험함이 수차였다. 그 후 어린 두 아들이 요사함에 일시 주저하였으나 망언에 굴함이 없어 사불범정(邪不犯正)의 굳은 신념으로 공사를 강행하여 완성하였다"고 기록됐다.

그렇다면 일대 어딘가 동자 부처와 금불상이 묻혔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7층 전탑은 기단부 팔부중상 등 면석 위에서 감실 사이에 시멘트 발린 모습이 안타깝다. 석물이 있었을 것이다. 사찰의 석물과 계단석의 일부 행방을 나 나름 추정한다. 법림사 절터는 역사 부지로 쓰였다. 전탑과 2.6m 높이 당간지주 남쪽은 시멘트 옹벽이고 그 서쪽도 둑이다. 게다가 전탑은 주변 지표보다 40㎝쯤 더 푹 꺼진 자리다. 절터와 전탑 주변을 성토했다는 의미다.

필자는 '영가지' 찬술자 권기의 후손이다. 안동 읍내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는 낡고 부족한 교실을 버드나무가 대신한 그늘에서 오전 오후 부제 수업을 받았다. 4학년 때는 두 학반 교실이 임청각 군자정이기도 했다. 중학교 땐 식목일이면 안동 주산 영남산과 벌건 황토가 드러난 36사단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었다. 가물 때는 수업을 제친 학교 측의 동원으로 지금의 안동역이 옮겨간 송야천에 하천 굴착으로 물길을 찾아야 했다.

앞으로 중앙선 철도와 역사 부지 용역 과정에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리라 여긴다. 중앙선은 지표조사(매일신문 3월 1일 자)와 달리 사역과 사세를 확인하는 등 발굴조사를 실시해 혹시 모를 동자 부처와 금불상을 찾아내고, 법림사에는 연당지라도 만들어 돌 코끼리·석용·토제 부처·토제 코끼리 및 사자를 세워 묻힌 통일신라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찾는 데 시계를 되돌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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