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이상정 장군의 독립운동 활동과 명예 선양

김태열 영남이공대 교수(한국보훈포럼회장)

김태열 영남이공대 교수
김태열 영남이공대 교수

오늘은 102주년 삼일절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독립유공자 중 대구 출신으로 대표적인 인물 이상정 장군은 1896년 6월 10일 대구 중구 서문로 2가 12번지에서 출생했고, 호는 청남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의해 독립운동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 조직을 결성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만주로 망명했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동만주(東滿洲)에서 중국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准將級參謀)로 활약했고,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 후엔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少將)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했다.

1936년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에 선출됐으나 중국 육군 참모학교의 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고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했다.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최동오(崔東旿) 등 27명과 함께 연서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 미, 영, 소 등 연합 각국 정부에 정식으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안을 제안하였다.

1942년 8월 시정부에서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제공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신익희(申翼熙), 장건상(張建相), 이현수(李顯洙) 등과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44년에는 강창제(姜昌濟), 홍진(洪震)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동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경(重慶)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中將)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이상정 장군은 보훈학적 관점에서 보면 독립운동 명문가 집안으로 국내 최초 여성 전투기 조종사 권기옥 애국지사가 아내이고, 민족저항시인 이상화의 친형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구 출신의 영웅이다. 1947년 10월 27일 뇌일혈로 갑자기 별세하여 10월 29일 계성학교에서 가족사회장으로 하였고, 장지는 대구 달서구 대곡동 소재 상화기념관·이장가 문화관 뒤 선영 가족묘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상정 장군 등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시민·학생들에게 널리 알리는 명예 선양 방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세부적인 강구 방안을 제시하면 첫째, 대구 출신 독립유공자를 한곳에 모아 전시 홍보 및 학생들의 보훈 교육 장소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이 절실히 필요하다. 둘째, 대구시가 주축이 되어 학계, 경제계, 언론계, 시민 등을 중심으로 30인 이내 TF 추진위를 구성해 적극적인 대시민 홍보와 매칭펀드 형태의 예산 지원 등 중장기적인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접근성이 용이한 곳에 기념관을 짓되, 기념관 내 호국보훈인물 전시관, 학생체험장, 보훈교육 학습장, 보훈영화 상영, 보훈학술 세미나 등 맞춤형 보훈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전국적인 보훈 테마 관광파크 형태의 기념관으로 설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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