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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의 영국이야기] 중요한 건 옷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영국인은 옷을 잘 못 입는다.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아무 옷이나 입고, 유행에 뒤떨어진 옷도 아랑곳없이 입는다. 수십 년은 된 듯한 구닥다리 코트, 뒤꿈치를 덧댄 자켓, 낡은 스웨터가 영국에서는 이상하거나 별스럽지 않다. 대부분 갈색, 회색, 베이지색 같은 기본적인 색깔에 디자인은 밋밋해서 점잖기는 해도 약간 촌스럽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던 느낌이 단지 오래된 건물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국 친구의 가족 연주회에 갔다. 예절을 중시하는 나라에서 연주자가 구겨진 셔츠와 티셔츠를 입고, 초대받은 손님들이 평상복을 입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 연주회에도 갔는데, 검정색과 흰색으로 통일한 지휘자와 단원들의 복장이 수수하고, 청중의 옷차림이 캐주얼했다. 결혼기념일이라며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는 친구가 옷에 개의치 않았다. 갤러리에서 전시를 보고 고급 찻집에서 애프터눈 티를 마시자며 런던까지 갔을 때도 여인들의 옷차림은 평소대로였다.

쭉 이상하고 신기했는데 실은 이랬다. 영국에는 전통 복장이 없고, 이제는 더 이상 복장에 대한 규정도 없다. 아무튼 지키는 것 하나는 잘하는 사람들인데,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옷으로 차려입고, 허드렛일을 할 때는 허드레옷으로 갈아입지만, '집에서 입을 만큼' 편하고 '외출해도 될 만큼' 반듯한 복장으로 거의 어디든지 간다. 평상복과 외출복의 구별까지 없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다.

영국인은 상대를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므로 옷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스타일이나 센스도 없다. 멋진 명품은 있지만, 그건 외국인에게 더 인기가 있는 듯하다. 명품아울렛에는 외국인들로 가득하고, 근검절약하는 영국인은 비싼 옷을 입지 않는다. 나는 영국에서 고가의 버버리 코트를 입거나 명품가방을 든 여인을 본 적이 없다. 화장을 하고 잘 차려입은 여인들은 텔레비전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고, 할머니들은 꽃무늬 원피스나 주름스커트를 입고, 대부분의 여인들은 맨얼굴에 수수한 옷차림이다.

남자들은 옷을 더 못 입는다. 옷에 관심도 없고 세련되게 입으려는 생각도 없다. 그저 적절하게 제대로 입는 것이 중요하다. 상류층의 나이든 남자는 티셔츠보다는 와이셔츠를 좋아하고, 계절에 상관없이 옷을 더 많이 겹쳐 입으며, 코트와 모자까지 갖춘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여름인데도 정장바지와 와이셔츠를 차려입고, 손님들의 아침을 나르는 흰머리의 민박집 주인이 와이셔츠 차림에 구두까지 신었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너무 튀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을까, 어떻게 하면 남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본인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잘 보이기 위해 너무 노력한 것이 들킬까봐 걱정한다. 그냥 적당히 입어서 잘 받아들여지고 잘 어울리기를 원한다. 신분이 높을수록 상표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옷, 지나치지도 않고 야단스럽지도 않은 옷, 유행에 뒤처지고 더 오래된 듯한 옷을 입는다.

내 모습을 돌아봤다. "You're old when comfort comes first.(편한 게 먼저라면 늙은 거다.)"에는 할 말이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외출복에 신경을 쓴다. 나이를 의식하고 체면까지 차리느라 복잡하고, 패셔너블할 필요는 없어도 스타일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면서 까다롭다. "I've shopped all my life, but still have nothing to wear.(평생 쇼핑을 했는데도 입을 옷이 없다.)"는 내 이야기 같다. 영국의 패션전문가가 나잇살이 붙은 여인들에게 옷 입는 법을 일깨워준다. "It's all about confidence.(중요한 건 옷이 아니라 자신감이다.)"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다. 이러쿵저러쿵 했는데, 나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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