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여성감독의 시대를 고대하며

이승우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창작지원팀장
이승우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창작지원팀장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 그리고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 등 일군의 여성감독들이 한꺼번에 등장했던 2000년대 초, 많은 영화 관련 매체들은 일제히 충무로의 새로운 물결이라며 뜨거운 관심을 보냈다. 아직도 '여성감독 전성시대', '여성파워' 같은 전형적인 문구들이 기억난다.

이 유치찬란한 문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10년대 초, 그 언저리였다.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 '화차'의 변영주 감독, 그리고 '용의자X'의 방은진 감독의 작품이 한창 주목을 받던 때였다. 10년 전 열릴 것 같았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던 여성감독 전성시대가 이번에야말로 열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침 헐리우드에서는 캐서린 비글로우가 여성 최초로 82년 만에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10년이 흘렀다. 요즘 들어 여성감독이 약진하고 있다는 언론기사가 부쩍 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지난해 헐리우드 개봉영화의 여성감독 비중이 16%로 급상승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호들갑 떨 정도의 수치는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순제작비 10억원 이상의 영화 중 여성감독 비율은 10%를 넘지 못했다. 10년을 주기로 회자되는 '여성감독 약진'이라는 레토릭은 남성 중심 주류 상업영화 시스템이 얼마나 공고한 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나마 이번에는 지난 20년과는 조금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적어도 독립영화계에서부터 변화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 때문이다. 괜찮은 독립영화는 죄다 여성감독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재 독립영화계의 흐름은 여성감독이 주도하고 있다.

작년만 놓고 봐도 '프랑스여자', '남매의 여름밤', '찬실이는 복도 많지' 등 평단과 관객의 고른 지지를 얻은 여성감독의 화제작들이 단연 돋보였다. 또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의 본선 경쟁작 27편 중 여성감독의 연출작은 23편으로 그 비율이 무려 85.2%에 달한다.

물론 이러한 독립영화계의 혁명적 변화가 주류 상업영화계의 관성 타파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이번만큼은 꼭 제대로 된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면 한다. 남자감독이 거친 영화현장을 잘 장악할 수 있다 같은 구태의연한 관성은 이제 깨질 때도 되었다.

이승우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창작지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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