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목사님의 군종사병

전헌호 신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

전헌호 신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
전헌호 신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

아무리 과묵한 남자도 군대생활이 화제가 되면 갑자기 달변가가 되기 일쑤다. 오늘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뚜렷한 나의 군복무시절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난 10년 동안 한 일들은 희미해져 가는데 40여 년 전에 했던 그 생활은 어찌 이리 아직도 또렷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논산훈련소에서 기초 군사훈련 후 이등병 계급장을 달게 된 기쁨(떨어지면 재수해야 했기에)과 더불어 부산 병참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강원도에 있는 군수지원 사령부로 배치되었다. 그곳에 배치된 다른 많은 수의 전입 장교 및 사병들과 함께 지시에 따라 연병장에 줄맞추어 서서 전입신고를 하는 시간이었다.

기본 예식이 끝난 후 단상에 있던 별 두 개 사령관께서 수많은 참모들과 부관을 거느리고 밑으로 내려와서 전입 장교와 사병들을 일일이 보시다가 내 앞에서는 멈추어서 다른 사병들에게는 묻지 않던 질문을 던지셨다. "자네 어느 대학 다녔는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놀람과 약간의 두려움 섞인 얼굴로 즉시 큰소리로 "예, 가톨릭대학교 다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령관은 부관을 보고 "이 신병을 병참부로 배치한 것은 잘못이 아닌가? 군종부(군인들의 종교 활동을 맡아 하는 특별 참모 부서)로 배치하게."라고 하셨다.

사령관과 함께한 군종참모 조한성 중령 목사님도 바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이 일은 미리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병들 중 하필이면 내 앞에 와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그런 조치를 취했는지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령관은 불교신자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와 배려로 간주하고 이 믿음으로 살아갈 의미와 에너지를 갖는다.

그 일 덕분에 나의 군복무는 가톨릭 신자 장병들을 위해 일하는 것과 더불어 개신교를 좀 더 깊이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다. 가톨릭 신학생은 나뿐이었고 개신교 신학생은 16명이었다. 서로 종파가 다양했으나 협력하기를 거듭했다.

시간이 좀 지나니 나에게 예배 사회를 보게 했다. 군대에서 상관인 목사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거니와 거절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사회를 끝까지 했던 것을 감안하면 썩 잘하지는 못했겠지만 중도하차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인근 부대에 군종신부님과 군종법사님이 계셨는데 조 목사님은 이분들과 종종 만나서 회의에 이어 긴 시간 즐겁게 식사하며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때 본 일인데 평소 달변가이던 조 목사님이 그 군종법사님과 함께한 자리에서는 좀체 말할 기회를 잡지 못하셨다. 침묵을 더 좋아할 것 같은 그 법사님이 재담을 늘어놓으면 모두 빠져들어 즐거워했다. 그분의 그 달변에 담긴 내용은 모두 잊었지만 대단한 달변이었고 대단히 흥겨웠다는 사실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10·26사태, 12·12사태에 이어 군사독재가 심화되던 시절이었지만 장교는 물론이고 사병들의 의식도 많이 개화되어 삶의 희망이 커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복무를 한 경험은 이어진 삶에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군복무 중 알게 된 개신교 신학생 몇 사람은 목사가 된 뒤에도 연락이 있었다. 목사에 대한 나의 호의적인 태도는 여러 명의 목사들이 내가 근무하는 대학 종교영성학과에 입학하여 박사학위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 같다.

훈련소 우리 소대 훈련병 대표였던 동화사 전 주지 효광스님과는 가끔 만나 서로의 내면세계를 나누는 관계를 이어왔다. 지난 가을 내가 있는 호산서재를 다녀가신 이후 두문불출 용맹정진 수행 중이신지 감감무소식이다. 스님의 해맑은 미소의 그 얼굴이 떠오르면 나도 미소 짓게 된다.

새삼 종교 간의 대화와 평화를 기원하게도 된다.

전헌호 신부,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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