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모든 학문의 뿌리이다." 대학에서 철학수업을 들은 사람이면 기억하는 말이다. 철학을 지칭하는 유럽어는 모두 고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한다. 그것의 의미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필로소피아가 철학(哲學)이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번역어를 얻게 된 것은 개화기 한 일본인의 신중치 못한 선택의 산물이다. 그의 번역어는 결과적으로 철학에 대한 오해의 단초가 된다.
경북대 도서관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철학개론(哲學槪論)은 1922년의 일본인 호아시 리치로(帆足理一郞)가 쓴 것이다. 1951년 10월 6일 경북대 문리과대학 철학과가 창설되고,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도 일본어로 된 철학개론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1953년 하기락이 경북대 철학과에 임용되면서 우리말로 번역된 철학개론이 출판된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 출신 하기락(河岐洛 1912-1997)은 한 해 뒤 부임한 동경대 철학과 출신 김위석(金渭錫 1917-1993)과 함께 1955년 독일 철학자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의 철학개론(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1914)을 번역한다.
하기락이 빈델반트의 책을 선택한 것은 그가 일본에서 공부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일본에서 독일철학의 영향은 압도적이었고, 그 중에서도 신 칸트학파의 대표주자인 빈델반트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빈델반트의 철학개론 번역서를 토대로 하기락은 일 년 뒤, 즉 단기 4289(1956)년 자신의 철학개론을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출판사 문성당(文星堂)을 통해 세상에 내놓게 된다.
전후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말해주듯이 종이의 질은 형편이 없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다. 책값은 850환이다. 당시 80kg 쌀 한 가마니가 3000환이었으니, 학생들로서는 쉽게 책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책의 뒷 표지 앞면에 부착된 도서 대출증이 말해준다. 도서 대출증에는 반납 날짜가 빼곡하게 찍혀 있다. 대출란이 부족하여 책의 표지에도 반납 만기일을 알리는 도장이 무수히 찍혀 있다. 대출자 중에는 세상에 이름을 알린 졸업생도 있다.
책의 서언은 집필동기와 경과를 말해준다. 원래 이 책은 대학교재를 목표로 경북대, 부산대 철학과 교수 중심의 공저로 기획되었으나, 실행에 차질이 생겨 결국 하기락의 단독 저서가 되었다. 글은 국·한문 혼용체이지만, 한문이 압도적이고, 독일어가 다수 등장한다. 이것 역시 시대적 한계로 보인다. 책의 내용은 전체 3편(編)으로 구성되었다. 제1편은 철학의 총론이고, 2편은 인식론, 3편은 존재론이다. 특히 3편의 존재론 부분에 기울인 하기락의 노력은 분량 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점 역시 빈델반트와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 등 독일 철학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철학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시대, 그의 철학개론은 미군부대의 폐목으로 급조된 강의실에 모였던 젊은 청춘들에게는 지적 갈등을 풀어주는 감로수였을 것이다. 연필로, 만년필로 그리고 볼펜으로 그어진 밑줄에서 그리고 실수로 쏟은 잉크의 흔적에서 그리고 용기를 내어 쓴 "人間은 죽기위하여 태어났다"는 낙서에서 이름 모를 청춘들의 열정과 고민을 발견한다. 올해가 경북대 철학과 창설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65년 전 하기락이 황무지에서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정낙림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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